민주주의는 헛점 투성이다. 모두가 투표권을 가진다는 말은 모두가 나라를 망칠 힘을 가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역사상 많은 독재자가 민주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거머쥐었다. 나치독일의 히틀러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정치 아웃사이더 시절부터 스스로가 포퓰리스트이자 극단주의자임을 거리낌없이 드러냈다. 그럼에도 많은 국민들이 그들을 지지했고, 표를 던졌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가 그 나라에겐 가시돋친 장미였던 셈이다.
이렇게 민주적으로 권력을 찬탈한 극단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서서히 망가뜨린다. 1930년대 독일, 1990년대 페루와 베네수엘라가 그랬다. 독일의 히틀러는 행정부 수반이 되자마자 입법권을 찬탈했다.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은 여소야대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판사제명권리를 행정부에 부여함으로써 사법부에 목줄을 채웠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이 할 수 있는건 없다. 선거에 승리했다는 명분, 추상적인 헌법을 이용한 법기술, 야망있는 권력자가 합쳐지면, 더 이상 무엇이 합법이고 위법인지도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할 수 있는건 그 과정을 무력하게 지켜보거나 민주주가 여전히 굳건하다 착각하는 것 뿐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미국의 경우 250년 가까이 민주주의가 제기능을 하고 있다. 17세기부터 의회 민주주의를 꽃 피운 영국은 현재까지도 건강한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왜 어떤 국가는 정치인 한 명으로 무력하게 무너지고, 어떤 국가는 몇백년 동안 굳건히 유지되는 걸까.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는 그 이유로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에만 존재하는 두 가지 규범, ‘제도적 자제’와 ‘상호 관용’을 제시한다.
헌법은 의도적으로 불완전하게 만들어진다. 곳곳에 공백이 존재하고 애매모호한 용어들로 가득하다. 이는 정치 상황에서 발생하는 무한한 경우의 수를 모두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권력자는 불완전한 헌법을 필요에 맞게 해석하여 외교, 안보, 경제 등 다양한 정치적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 할 수 있다. 문제는 야망있는 권력자가 헌법의 이런 불완전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한을 끊임없이 확대해석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이 ‘제도적 자제’이다. ‘제도적 자제’란 권력자가 스스로 권한을 축소해석하고 자제하여 행사함을 뜻한다.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자는 이 규범을 준수하기 때문에 원할한 협치가 이루어진다. 한국의 경우 국회 인사청문회가 대표적 사례이다. 국무위원, 헌법재판관에 관한 인사권은 전적으로 대통령에게 있다. 이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한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인사청문회에서 큰 결격사유가 드러난 인사를 강행하지 않는다. 이는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인사권을 조심스레 행사하고 입법부를 존중하는 '제도적 자제'의 좋은 예시이다.
‘상호 관용’은 간단한 개념이다. 상대 진영의 정치인을 경쟁자인 동시에 함께 국가를 통치할 동료로 인식함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자신과 진영이 다른 정치인을 위협적인 존재, 절대 악 따위로 인식하지 말라는 뜻이다. '상호 관용'은 정치문화가 극단주의로 떨어지지 않게 막아주는 가드레일이다. 극단주의자가 권력을 잡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정치경쟁자를 악인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극적인 발언을 뱉어내고 대중을 선동한다. 자기가 지지하는 진영이 '선'이라 착각할 때, 대중은 생각을 멈춘다. 그저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속시원히 해주는 정치인에게 표를 던지게 된다. 그렇기에 ‘상호 관용’이 무너진 나라의 정치문화는 필연적으로 극단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제도적 자제’와 ‘상호 관용’은 성문화된 규칙이 아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함께 자리잡은 중요한 규범이다. 이 두 규범이 무너지면 그 나라의 정치문화도 함께 무너진다. 2022년부터 2024년 까지의 대한민국이 그랬다.
2022년 10월 22일, 촛불행동이 주최한 윤석열 퇴진 시위(좌)*사진출처 한겨레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윤석열 전 대통령(우)*사진출처 뉴스1
촛불행동은 더불어민주당 다선의원이자 현 국무총리 김민석의 친형인 김민웅이 설립한 시민단체로, 주로 민주당 진영의 이익을 대변한다. 2022년 10월 22일, 촛불행동이 주최한 윤석열 퇴진시위에 약 1만 5천명의 시민이 모였다. 당시 윤석열은 취임한지 5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신생대통령이었다. 탄핵의 명분이 될만한 스캔들이나 범죄혐의도 없었다. 그럼에도 시위에 1만 5천명이 모였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상호 관용’이 조금씩 파괴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민주당진영의 이런 행보는 2024년 4월, 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75석을 차지하며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국회 출범 후 반년 동안 무려 11명의 고위공직자를 대상으로 탄핵소추안을 발의한 것이다. 이는 행정부를 무력화하겠다는 명백한 의도였다.
이런 상황에 압박감을 느낀 윤석열 전 대통령은 전국을 대상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비상계엄령은 대통령이 가진 고유권한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명백하게 ‘제도적 자제’를 어긴 행위였다. 공산세력과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는 명분은 국민들의 공감을 사지 못했고 절차적 정당성도 충족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최악의 선택이었던 비상계엄은 국회에 의해 해제되었고, 윤석열은 이듬해 4월 파면당한다.
사실 계엄령 선포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계엄령이 해제되었든 되지 않았든, 윤석열이 파면되었든 되지 않았든, 지난 6월 있었던 대선에서 누가 승리했든, 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야당이 선출된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대통령이 야당을 무력으로 진압하려한 순간 대한민국의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는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규범이 사라진 자리엔 극단주의가 자리잡아 대통령자리에 누가 있든 국민 중 절반은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완성되었다.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로 선출된 정청래 의원(좌)*사진출처 뉴스1
국민의 힘 합동연설회에서 연설하는 장동혁 의원(우)*사진출처 연합뉴스
앞으로 우리나라의 정치는 어떻게 흘러갈까. 아마 최근 있었던 양당의 전당대회로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슬프게도, 최소한 내년 지방선거 까지는 극단주의 시대가 유지 될 듯 하다.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정청래 의원이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대학생 시절 미국 대사관저에 폭탄테러를 해 징역을 산 이력이 있다. ‘윤석열은 사형선고 받을 것’, ‘(국민의 힘을 언급하며)악수도 사람과 하는 것’ 같은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했다. 22대 국회 법사위원장으로서 명분없는 11건의 탄핵소추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국민의 힘은 장동혁 의원이 돌풍을 일으키며 당대표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가 선거기간 내내 내세운 슬로건은 ‘싸우지 않는 자, 뱃지를 떼라’이다. 합동연설회에서도 ‘싸움’, ‘도둑맞은 정권’, ‘보수세력 단일대오’ 등 자극적인 키워드들로 빠르게 지지세를 끌어모았다. 두 당대표 모두 지금까지의 여느 당대표들보다 공격적이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정당정치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의 정치문화는 일찍이 극단주의라는 철로에 올랐다. 가속도는 빠르게 붙어 더욱 충격적인 발언을 정치인의 입을 통해 듣게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5년 전까지만 해도 정치인들은 상대진영의 정당에게 ‘해산시켜야 할 정당’이라는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런 공격은 상상도 하지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난 4월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민의 힘은 내란공모정당으로서 해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라고 발언했다. 현역 의원이 공식석상에서 하기엔 부적절한 발언이다. 이는 국민의 힘도 마찬가지이다. 장동혁 의원이 국민의 힘 당대표로 선출된 후 가장 먼저 한 말은 ‘이재명 정권을 끌어내리는데 제 모든 것을 바치겠다’ 였다. 이재명 정부는 이제 출범한지 3개월이 조금 지났다. 관용과 존중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을 취합해보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절망적이다. 양극화 된 지지자들은 서로를 평생 미워할 것만 같고, 여당과 야당의 협치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망가진 정치문화를 재건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는 이 질문에 회의적으로 대답하면서도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광범위한 연합 전선의 형성이다. 저자는 극단주의자가 권력을 잡았을 때 이념, 성별, 인종이 다른 다양한 정치 공동체가 연합하여 빅텐트를 펼쳐야 한다고 말한다. 추구하는 바가 다른 여러 세력이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명분 아래 모일 때, 관용과 존중이 부활하고 건강한 정치 문화가 재건된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인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색의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이념은 합리적 판단의 결과라 생각하고, 상대 진영의 지지자들은 멍청하거나 악해서 그런거라 치부한다. 이는 나와 다른 생각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치이념이 전혀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건 단순한 도덕률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당을 증오해도 된다. 하지만 증오스러워도 어쩔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내가 혐오하는 저 정당이 사라지면 정치문화가 건전해질까? 슬프게도 정치에서 한쪽 진영의 몰락은 독재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꼴도 보기 싫은 저 정당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정치인들에게 무의미한 공격을 멈추라 요구하고, 가열된 분위기를 식히라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상호 관용'이 부활하고 건강한 정치문화가 재건된다. 이것은 국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모두가 투표권을 가진다는 말은 모두가 나라를 바로세울 힘을 가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