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0, 장충체육관 GS칼텍스 VS 흥국생명
장충체육관, 홈구장을 빼앗긴 GS칼텍스의 응원은 풀이 죽은 지 오래다. 기세는 원정팀에 있어 홈의 응원단장에게 마이크가 있어도 소용없었다. 마이크를 들고서 그가 한 일이 간청이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에서 그랬던가, 사랑은 간청할 수 없다고. 그건 응원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은 안에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라서 승리에 대한 의지나 패색을 견디는 힘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적어도 이곳에서 김연경을 흠모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김연경을 마음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어떻게 있겠는가. 원정석의 흥국생명은 멀리서 보아도 분홍색이 뚜렷했다. GS칼텍스의 홈구장에 앉으니 안타까운 소리를 내며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옆자리에 앉은 이는 배구 자체를 보러 온 것인지 어떤 팀의 플레이에도 미동도 하지 않아서 슬쩍 보니 가방에 김연경 열쇠고리가 걸려 있었다. 체육관에는 이렇게 샤이 흥국생명 팬이 가득했을 것이었다.
3세트, 전광판의 스코어는 벌써 14:23. 기시감이 든다. 전전 세트와 또 비슷한 숫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얼마 남지 않았다. GS칼텍스는 이번 경기에서 한 세트도 20점을 따내지 못했다. 끌려가지 않기 위한 1세트가 있었다. 흐름을 끊기 위해 감독은 수차례, 수시로 타임을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언제나 두 팀의 0:0으로 시작이 같았음을 생각하자 더욱 두려워졌다. 5점 때까지는 얼추 비슷했던 점수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상대편은 이제 2점만 따내면 된다. 절망적인 스코어. 승기가 아무리 확실해도 아직 승리가 아니기 때문에 공은 떠올라야 하고 패색이 짙어도 그 패색을 완성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2점을 또 견뎌야 한다니 마음이 아팠다.
승기가 기운 지 오래였으나 그랬거나 말거나 공은 다시 처음처럼 떠올라, 대포같이 쏟아지는 서브를 겨우 받아내고 아포짓에게 올라오는 토스는 너무나 길고- 뚜렷한 궤적을 그려 상대편의 리베로는 이미 자리를 잡고 공을 기다린다. 흥국의 리베로 김해란은 정확하게 받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세터처럼 올린다. 그러니 이 팀에는 세터가 둘이라고 해야 한다. 저 공은 거리와 높이만을 잰 것이 아니라, 속도와 구질까지 모두 세팅된 것 같다. 김연경은 수비에서도 분명히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데 공을 너무나 잘 받는다. 거미처럼. 공은 코트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는다. 여유 있게 받아 올리는 공, 그러다가 공격에 참여할 때는 그 강약의 조절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인데, 그 대미는 그녀의 강렬한 포효 이후 거미처럼 긴 손으로 팀을 모두 감싸 안고 파이팅을 외치는 데 있다. 경기의 흐름을 만들어내거나 끊거나 모두 가져가 버리는 사람인 것 같다.
GS는 높이가 낮고, 공격이 단조롭고, 서브는 거의 대부분 5번 자리에 쏟아졌다. 강소휘는 너무나 많은 서브를 받아내고도 스파이크를 위해 뛰어올라야 했다. 모마는 팀의 대부분의 점수를 따냈지만 너무 많은 공이 약속처럼 그녀가 있는 곳으로 보내져, 상대편이 이미 받을 준비를 끝낸 후에 쳐들어 갔다. 중앙이나 속공, 백어택 등의 공격이 거의 없었다. 공격 패턴의 단조로움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약간 지루하게도 느껴졌다. 안타까운, 감독의 팔짱과 풀어짐 사이로 선수들은 분주하게 뛰었으나 실수도 잦았다. 한 사람이 각각 자신의 자리를 훌륭하게 해내는 건 물론이면서도 팀이 한 사람처럼 움직여야 한다는 건 몹시 어렵다. 방금 내어준 1점에는 누군가를 탓할 수 없는 팀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 안에 자신의 실수가 얼마간 녹여져 있다는 것을 모른 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완벽하게 0:3으로 지고 나오는 길이었다. 이렇게까지 지지 않아도 되었다. 한 점을 따내기 위한 너무나 많은 수고, 그러나 한 점을 잃는데 걸리는 눈 깜짝할 시간의 차이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팀이 얻는 점수는 왜 이렇게 힘들었나. 완벽하게 지는 것을 보여주는 경기는 한편으로 완벽한 승리를 비춰서, 김연경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있었다.
정말 무서운 건 25를 기록해 종료된 점수보다, 25점을 향해가는 23점이었고 그걸 막을 수 없는 걸 알면서 버텨야 하는 14점이었다. 이 막대한 점수차에도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 누구라도 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판명하는 경기의 한가운데서 지는 것을 마침내 완성해야 하는 순간이 남았다는 게 무서웠다.
그들은 23:14에서 1점이 두고 경기하는 것이 아니라 0:0에서 1점을 얻고 뺏기는 듯이 점수를 내주어야 했다. 지나간 모든 점수가 만들어낸 눈덩이를 치우고, 눈앞의 다시 1점에 집중하는 것. 그래서 이 세트의 스코어는 14번의 승리와 25번의 패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뭉뚱그려져 크게 쓰이는 숫자가 아닌 세세한 승패의 기록. 매번 새롭게 지면서 또 새롭게 이기는 날들. 최종적으로 승리든 패배든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아야 가능한 면면이었다.
GS칼텍스는 그 후 인삼공사와의 홈경기에서 다시 0:3을 기록하며 또 한 번의 대패를 완성했다.
이 경기에 사랑과 자기계발과 인생의 어떤 면을 결부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그저 경기가 끝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한다. 다시 붙어볼 수 있을 것이다. 전열을 가다듬고, 처음의 패배와 승리인 듯 마음하고.
이제 게임을 끝낸 선수들은 대절 버스를 타고 돌아간다. 스코어가 인생의 일부가 되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에게도 평범한 밤들이 있을 것이다. 응원석에 마음을 졸이며 응원을 하다가 자리를 털며 일어나는 이에게 이 승패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 머나먼 간극을 들여다 보면 저 관중석의 이름없는 사람에게도 작은 코트가 있어 아무도 봐주지 않고 응원하지 않는 경기가 늘 열리고 있다. 그러니 이 스코어에 마음이 아픈 것이다. 언젠가 당신에게 있었을 것이고, 내게도 있던 스코어. 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