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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Mar 21. 2023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대개의 큰 일들이 별 볼일 없는 시작으로 유명세를 기약하는 것처럼 <제1회 피아노와 카멜레온의 밤>도 하릴없는 잡담에서 시작되었다. 작년 여름, 우리는 작은 피아노 연주실에 얼굴에 홍조를 띠고 모였다. 그날 도착한 사람은 모두 다섯 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 명 한 명의 움직임이 주목되고, 부산스러웠고, 사람이 매우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작은 공연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유례없이 주최측보다 적었던 관객 두 명도 긴장했다. 관객은 무릇 객석을 가득 채워 무대를 압도하면서 몰두하고 감동하여 마침내 극을 완성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러기에 두 명은 아무래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규모였다. 그들은 심란하게도 이 날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다양한 굿즈를 제작해 와서 무대에 오른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응원하며 공연에 참여했다.


한 명은 장소를 구하고, 한 명은 포스터와 굿즈를 만들고, 한 명은 맞장구를 쳤는데 그게 나다. "드레스 코드는 카멜레온처럼 녹색이 어떨까요?"라는 진부한 제안을 주로 맡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각자의 초록을 걸치고 만났다.


마침내 그날이 와버렸다. 보기만 해도 웃기는 포스터와 배너를 여기저기 붙였다.

심상치 않은 배너


행사 포스터를 보면, 그날 공연이 얼마나 완성도 높았는지 알 수 있다. 중앙에 카멜레온이라고 불리는 것이 얼룩덜룩하게 들어가 있어 기이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사선으로 시선을 이어나가면 절묘하게도 두 대의 피아노와 만나는데 이 구성은 다시 보아도 놀랍다. 상단의 로고는 유서 깊게도 1898년에 세워진 독일의 클래식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온 것이다. 자세히 보면 '도대체 카멜레온'인데 대충 읽으면 '도이치 그라모폰'이 된다. 운명 같은 네이밍이 아닐 수 없다.


왼쪽의 로고, 자세히 보면 '도대체 카멜레온'인데 대충 읽으면 '도이치 그라모폰'

이어서 포스터를 만든 제작자의 말을 받아 적으면, 쇼팽을 치는 손은 거품기이고 슈베르트의 피아노 연주는 집게(?)와 전동 그라인더이다. 피아노를 사랑하는 전 세계 덕후들의 고통과 유머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걸 손으로 연주한다고? 믿을 수 없어!'라는 듯한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연주자들의 손이 얼마나 혹사당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는데, 이날 공연에서 실제로 두 개의 거품기 쇼팽과 그라인더처럼 건반을 오가는 슈베르트를 들었다는 후기를 전한다.


포스터의 방점은 제목 다음으로 큰 폰트의 "굳이 여러분을 초대합니다"는 딱지인데, 이 프로그램의 취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을 한 사람이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렇듯 피아노와 도대체 종이접기는 손으로 할 수 있다는 공통점으로 만났다(하지만 손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 수 만 가지 일들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작은 공통점을 기뻐하고, 무대에 같이 올라가기로 했는데 아직까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만 취미이든 프로이든 수 백 년 전의 클래식을 연주하는 근엄한 피아노의 장소에 종이 접기가 위트를 더해주었다는 점에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카멜레온 종이접기는 20분 정도 걸린다.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지만 변화하는 요소가 적재적소에 들어가 있다. 특히 카멜레온의 반쯤 뜬 눈과 턱을 입체적으로 구현하고, 꼬리를 말아 내리는 부분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카멜레온을 접는 손. 드레스 코드는 녹색. 자세히 보면 완성된 카멜레온이 있다.


그러나 평소 종이접기를 전혀 하지 않거나 왕년에 학 혹은 거북이나 접던 이들에게는 심장이 놀랄만한 난이도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슈베르트와 쇼팽에게 대적할 만한 접기를 선보여야 했으므로, 제법 팽팽하게 피아노와 긴장을 이루는 선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무대 위로 올라간다. 구태여 작은 계단과 조명을 마련해 다른 마음가짐으로 '그곳에' 선다. 자신이 해보고 싶은 배역을 수행하기 위한 걸음이 대단할 것은 없지만, 이런 순간을 마련하는 것은 자신으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물어보고 확인하기 위함일 것이다.

관객분이 만드신 굿즈. 쇼팽과 슈베르트가 울려퍼지자 카멜레온이 살아 움직이다니... '여름이었다.'

굳이 번거롭고 긴장되고 진땀 나게 행사를 벌이는 이유는 지금까지 지속한 수많은 '연습'을 끝내는 '사건'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이다. 연주와 연습은 다르다. 연습 중에 틀리면 언제든 다시 반복할 수 있지만, 연주는 아니다. 틀린 채로 끝까지 가야한다. 연습이 더 나았을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무대가 다르기 때문에 비교될 수 없다. 그건 연습과 다른, 반복할 수 없는 엄숙함 속의 재미이다.


완연하게 30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초등학교 시절 이후 대규모로(?) 함께 종이를 접었던 기억은 여간해서 잊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이 이렇게 잘 접지 못하고 허둥거리며, 절망까지 느끼게 될 줄 몰랐다고 말했는데 이런 대답은 공연을 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어떤 훗날 ‘종이접기 공연을 참여한 적이 있는데요 허참’,라고 이상한 운을 떼며, 종이 접기의 어려움과 절망과 진땀과 작은 결과물에 대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를 흥분의 도가니로 가져다 준 눈물 나는 굿즈 2_피아노와 카멜레온의 밤 빼빼로


그렇게 더웠던 작년을 생각하는 지금은 3월도 중순, 목덜미 따뜻한 순한 바람이 분다. 추웠던 날보다야 근심이 덜하고, 목 단추를 몇 개 열듯 마음도 풀어지는 날씨에, 아무것도 없던 가지에서는 꽃이 핀다. 여기서 주의 깊게 볼 것은 꽃이 '피어난다'는 말이다. 활짝 핀 꽃을 보느라 우리가 잊는 것은 꽃봉오리가 '접혀' 있는 방식이다. 겨우내 돌돌 접혀 있던 꽃이 계절을 선택해 피어난다. 꽃이 선택한 접기.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온 계절을 준비해 꽃이 피고, 당신이 접혀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구태여 묻거나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비비언 고닉의 책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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