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추천 앨범
내가 빌 에반스를 접하게 된 계기는 조금 특이하다.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는 심한 불면증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입시지옥과 맞물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잠에 들 수 있을까. 거의 몇 달 동안 하는 고민만 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잠이 잘 오는 쿨 재즈 앨범'. 잠이 잘 온다는 말만 믿고 그 글을 읽어보았다. 재즈 중에 이른바 '쿨 재즈'라는 장르가 있는데 그중에 이런저런 앨범이 좋더라. 뭐, 그런 내용이었다. 다 들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하나를 골라 듣기로 했다. 그게 바로 <Undercurrent>였다. 순전히 앨범 자켓의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고른 앨범이었다. 재즈 기타리스트 '짐 홀'과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듀엣으로 만들어진 앨범이다.
쳇 베이커의 커버로 유명한 곡인 My Funny Valentine이 앨범의 첫곡이다. 우수에 젖은 목소리와 눅눅한 트럼펫 톤이 특징인 쳇 베이커의 버전과는 달리 빠르고 장난스러운 느낌으로 편곡되어있다. 이 곡을 듣고 '이렇게 산만한 곡이 잠을 잘 오게 한다고?'라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인상 깊은 점은 듀엣의 비중이 거의 5:5로 나뉘어있다는 것이다. 또 그와 동시에 조연과 주연의 역할을 확실히 하고 있다. I Hear A Rhapsody는 기타가 이끌어가는 곡이다. 피아노는 코드를 짚으며 반주에 몰두한다. 그러다가도 곡의 중반부에는 잠시 피아노 연주가 펼쳐지고 후반부에는 다시 기타 파트로 곡이 끝난다.
Skating In Central Park는 평화로운 분위기의 곡인데 피아노와 기타가 멜로디를 계속 번갈아가면서 연주한다. 이 곡은 누가 주연이 다할 것 없이 곡을 같이 이끌어간다. 비유하자면 두 사람이 함께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느낌이다. 그 정도로 조화롭고 매끄럽게 진행된다. 개인적으로도 아주 좋아하는 트랙이다.
앨범의 전반부는 주로 기타의 선율에 피아노가 반주를 하는 식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둘의 연주가 더욱 복잡해지면서 어떤 경계가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정말 두 명연주자의 협연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앨범이다.
그렇게 나는 불면증이 완화되진 않았지만 빌 에반스에 깊게 빠져들었다. 나 역시도 피아노를 치던 사람으로, 단순히 음악이 좋다를 넘어서 어떤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빌 에반스는 트리오로 더 유명하다. 재즈 역사에서 위대한 트리오를 꼽으라고 하면 빌 에반스 트리오가 자주 언급된다. 트리오의 매력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사운드에 있다. 리듬(드럼), 저음부(더블 베이스), 선율(피아노) 이 세 가지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알맞은 소리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브라스가 없다는 조금 허전한 느낌은 여백의 미로 남겨둔다. 작은 카페나 바에서 세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연상된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제작된 4개의 앨범들은 빌 에반스 트리오의 커리어 중 최고로 꼽힌다. 재즈 트리오 역사에서도 훌륭한 본보기로 남은 클래식이다. 베이시스트에 '스콧 라파로', 드러머에는 '폴 모시안'이 참여했다.
1959년작인 <Portrait In Jazz>. 재즈 연주가들에게 사랑받아온 명곡인 Come Rain or Come Shine과 Autumn Leaves의 커버가 수록되어있다. 사실 원곡과 트리오의 버전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거의 다른 곡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창의적인 해석이 돋보인다.
이 앨범의 의의는 빌 에반스가 드디어 '진정한 의미로서의' 트리오를 시작하였다는 데 있다. 스콧과 폴이 멤버로 있는 이 트리오는 그의 세 번째 트리오로, 이전에도 트리오 구성에 도전한 적이 있지만 그의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빌은 베이스와 드럼이 그저 배경으로 남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스콧과 폴의 연주는 그의 기대에 완벽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부합했다.
Come Rain or Come Shine은 정석적인 피아노 트리오 연주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빌의 장기자랑(?)이 끝난 뒤 이어지는 Autumn Leaves가 그 정석을 깨뜨려버린다. 발랄한 피아노 연주가 시작된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서 갑자기 베이스가 앞으로 튀어나온다. 마치 뮤지컬에서 스포라이트가 배우를짜잔하고 비추면 독창을 시작하는 것처럼 베이스는 신나게 독주를 펼친다. 조연이 주연이 되는 순간이다.
마지막 트랙으로 수록된 Blue in Green은 빌 에반스가 몸담았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섹스텟(6중주)이 <Kind of Blue>를 위해 녹음했던 곡이다. 당시엔 빌과 마일스의 공동 작곡으로 기재되었으나 실은 거의 빌 에반스의 단독 작곡이었다는 후문이 있다. 두 버전을 비교해서 들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리고 트리오가 추구하던 자연스러운 인터플레이는 <Exploration>에서 더욱 확립된다. 이 앨범을 주욱 듣다 보면 전작에 비해 훨씬 여유가 넘치는 것이 느껴진다. 앨범 자켓만 봐도 무표정으로 상반신만 찍혔던 전작과 달리 여유로운 포즈와 자신 있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베이스의 지분이 확실히 늘어났다. 그리고 피아노와 베이스가 서로를 의식하면서 연주하는 것이 명확하게 들려온다. 피아노가 페이드 아웃되듯이 작아지면 베이스의 피치가 올라가면서 연주가 시작된다. 마치 스튜디오에서 누군가가 두 세션의 볼륨을 조절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Beautiful Love가 두 버전 수록되어 있는데 베이스 연주가 확연히 다르다. Take 1이 제멋대로인 느낌이라면 Take2는 어느 정도 리듬을 유지하고 있어 다른 두 세션과 좀 더 호흡하는 느낌을 준다. 두 트랙의 베이스 연주는 꼭 귀 기울여 들어보길 바란다.
그리고 1961년, 트리오 역사상 최상의 라이브 앨범 두 장이 제작되었다. 바로 <Waltz for Debby>와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이다. 전자는 동명의 수록곡이 워낙에 유명할뿐더러 재즈 명반으로도 숱하게 꼽혀와서 많은 이들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후자는 덜 유명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반이 아닌 것은 아니다. 두 앨범 모두 훌륭한 연주를 보여준다. 그리고 모든 곡은 클럽 '빌리지 뱅가드'에서 녹음되었다.
내가 이 앨범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연주도 연주지만 배경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이 라이브 감을 살려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부터 이따금씩 들려오는 접시 소리(아마도 식사를 하는 듯하다)가 재미있다. 사실 당일에 참석한 사람이 너무 없어서 지인들을 동원했다는 안습한 후문이 있다...
이 앨범은 특이하게도 첫곡인 Gloria's Step과 마지막곡인 Jade Visions가 모두 베이시스트인 스콧 라파로에 의해 쓰였다는 수미상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가 쓴 곡인 만큼 베이스는 최상의 연주를 들려준다. 리듬감이 있는 Gloria's Step에서는 다른 세션에서 독립되어 메인 악기인 피아노와 완전히 동등한 연주를 펼친다. 그에 비해 느리고 서정적인 Jade Visions에서는 세 세션 모두 철저히 절제된 연주를 들려주는데, 여기서 느껴지는 세 악기의 완벽한 호흡은 긴장감마저 흐르게 한다. 무심하게 곡이 끝나고 박수가 터져 나올 때는 소름이 돋는다. 앨범의 하이라이트인 Alice in Wonderland도 반드시 들어보길 바란다. 거슈윈의 원곡을 편곡한 것으로 사람이 악기로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바로 이 경지에 오르지 않을까 싶다.
같은 날 <Waltz for Debby>에 수록될 트랙들도 같이 연주 및 녹음되었다. 하나의 라이브를 두 앨범으로 쪼개어 내놓은 셈이다. 그리고 열흘 후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가 교통사고로 인해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젊은 천재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결과적으로 <Waltz for Debby>는 스콧의 사후에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여전히 스콧이 빌, 폴과 연주하는 모습이 소리로서 기록되어있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빌은 무너져버렸다. 당연히 트리오는 해체되었고 더 이상 밴드를 꾸리지도 않았다. 빌은 마약에 깊게 빠져들었고 몸도 마음도 망가져갔다.
그에 비해 이 앨범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서정의 극치를 달리는 My Foolish Heart부터 조카를 위해 만들었다는 자작곡 Waltz for Debby, 발랄한 스윙 리듬의 My Romance, 레너드 번슈타인의 곡을 편곡한 Some Other Time까지. 버릴 곡이 하나도 없는 (다른 앨범도 거의 마찬가지이지만...) 앨범이다. 전작이 세 명의 연주력이 돋보인 앨범이었다면, 이 앨범은 이 천재적인 트리오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는지 그 애정이 느껴진다. 특히 빠르고 가볍게 몰아치는 Milestones를 듣다 보면 한 여름밤에 재즈 페스티벌에 온 기분이 든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앨범이다.
빌 에반스를 처음 듣거나, 혹은 재즈 자체를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 아주 추천하는 앨범이다. 지루하지도 않고 난해하지도 않아 입문용으로 아주 알맞다.
빌 에반스는 말수가 적고 자주 생각에 잠기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음악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서 창의적인 편곡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입이 아닌 피아노로 대화했다. 그래서 훌륭한 트리오를 만들 수 있었다. 후대의 유명한 피아니스트들, 허비 행콕과 칙 코리아 등은 모두 그에게 크나큰 빚을 지고 있다. 빌 에반스가 건반 위에 펼쳐놓은 무수한 가능성들은 후배들에 의해 지금까지 발견되어왔고 앞으로도 발견될 것이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면 언제나 몸을 낮게 수그리던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영혼은 모든 재즈 피아노에 깃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