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피폴라> 팀이 마지막 결선 무대에 섰다. 나는 재빠르게 #3388로 ‘2번 호피폴라’를 찍어 문자를 보냈다. 프런트맨 아일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고 건반을 누른 손은 부드럽게 허공으로 올라갔다 내려온다. 그의 목소리는 맑고 깨끗한데 한번씩 비성 섞인 소리로 끝음을 처리할 땐 설렌다. 기타를 메고 노래하는 하현상은 수줍음 많은 소년같다. 풋풋하게 노래하다가 절규하듯 내지르는 고음 앞에서 성숙한 매력을 발산한다. 첼로를 연주하는 홍진호는 클래식이 대중음악 속에서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그가 활을 켤 때 우리 안에 낮게 깔려있는 영혼이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열아홉 살 김영소는 감성과 실력을 겸비한 천재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손가락을 현란하게 움직여 최고의 현악기를 연주하다가 기타를 드럼과 같은 타악기로 변신시키기도 한다.
<슈퍼밴드>(JTBC/2019.4.12-7.12./14부작)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이 네 사람은 밴드 <호피폴라>를 결성한다. ‘호피폴라(hoppipolla)’는 아이슬란드어로 ‘물웅덩이에 뛰어들다’는 뜻이다. 밴드의 이름처럼 그들은 음악이라는 웅덩이에 풍덩 뛰어들어 마음껏 논다. 이 넷이 처음부터 한 밴드로 참가한 것은 아니다. 각자 개인으로 참가해서 여러 사람과 이 밴드, 저 밴드를 만들어 보다가 끝에 가서 넷이 한 밴드가 되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호피폴라>의 팬이 될 수밖에없었다.
처음에 하현상이 속한 팀은 두 번이나 상대팀에게 5대0이라는 완패를 당했다. 심사위원 다섯 명이 하현상 팀에게 한 표도 주지 않아 프런트맨이었던 하현상은 의기소침해 있었다. 3라운드에서 새로운 팀을 결성해야 할 때 아일이 이런 하현상을 뽑아 주었다. 하현상의 진가를 눈여겨 보았던 것이다. 아일은 좌절해 있는 하현상에게 말한다. “현상이 이번에는 꼭 이기게 해 줄게. 현상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다른 멤버도 “현상이, 현상이, 우리 현상이”하며 격려한다. 아일과 하현상, 홍진호가 한 팀이 되어 부른 <1000x>는 감정선이 돋보였다. 심사위원 윤종신은 마치 성장영화를 보는 듯 했다고 한다. 노래 끝부분에서 소년이 막 달려가며 성장해 가는 모습이 상상되었단다. 나는 그 소년이 다름 아닌 하현상이라 생각한다.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포기하려던 그 순간에 새로운 팀을 만나게 되고, 성장을 이루고 있는 그의 모습이 노래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개인으로 있을 때, 썩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와 있는지에 따라 더 좋아 보이기도 하고, 영 별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함께했을 때 서로를 빛나게 해 주는 존재가 있다. 현상이 가진 능력은 높았지만 아일을 만나기 전에는 그것이 발휘되지 못했다. 결국 아일과 함께할 때 현상의 보컬이 인정받아 슈퍼밴드에서 우승을 하게 되었다. 아일 또한 현상을 만나서 자신의 매력을 한껏 표현할 수 있었다. 현상이 아일과 하모니를 이루니 아일의 음색이 돋보였고, 현상이 보컬을 든든하게 맡아주니 아일이 피아노 연주를 우아하게 할 수 있었다.
이십 대 중반에 친구와 진지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 둘은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되지 않았고 연애의 마침표가 우리에게 남겨준 바들을 나누었다. 그들과 함께할 때 우리는 움츠러든 꽃봉우리와 같았고 활짝 피어 아름다움을 뿜어낼 수 없었다. 우리의 존재는 보잘 것 없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만나야 할 대상은 서로를 빛나게 해 줄 사람이었다. 적당히 가리고 숨겨서 내보여야 한다는 불편함 말고, 있는 그대로 당당히 드러내며 편안함으로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 과연 우리가 알아볼 수 있을까. 뒤따르는 의문점들도 있었지만 그 시절 그렇게 우리는 성장하고 있었다.
수 년이 지나서 그 친구도 나도 누군가를 만났다. 서로에게 태양이 되어 눈부시게 빛나게 해 주었는지 백열등의 밝기만큼 조금 빛냈는지 알 수 없으나, 어둠에서 물러나게 해 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서로를 밝혀주고 있는지 조금은 의심하면서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