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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중한날의꿈 Dec 25. 2019

일상, 그 순간

김치볶음밥을 먹다가

어김없이 밥 때는 돌아오고 한 끼를 해결해야 한다. 머리로 무얼 먹을지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반응하며 냉장고 문을 연다. 김치와 달걀, 냉동밥 두 통으로 한 가지 메뉴가 결정된다. 얼린 밥을 전자레인지에 7분 돌려 둔다. 프라이팬에 달걀 네 개를 굽는데 뒤집다 모양이 흩어진다. 움푹한 팬을 달구고 카놀라유를 붓고 총총 썬 김치를 볶는다. 녹인 밥과 김치를 잘 섞으며 설탕 약간, 참기름을 넉넉히 둘러 김치볶음밥을 만든다. 어제 만들어둔 된장찌개와 호박볶음을 데운다. 빨간 밥 위에 달걀 하나씩 올리고 된장찌개와 반찬 한 가지를 곁들이니 소박한 한 끼 식사가 완성되었다.

여러 반찬에 젓가락질 갈 일이 없어서인지 금세 한 끼를 해치웠다. 간단히 한 끼를 먹은 것 같은데도 싱크대에는 설거지거리가 잔뜩 쌓였다. 김치볶음밥 그릇4개, 된장찌개 그릇2개, 호박볶음 그릇2개(보관 그릇1개, 엄밀히 말하면 뚜껑까지 2개. 상 위에 오른 접시 1개)에 수저 4벌, 프라이팬 2개에 냄비 1개라니. 아침 한 끼 먹었을 뿐인데 설거지가 넘친다. 토요일이니 앞으로 두 끼를 더 해결해야 한다고 치면 나는 이 짓을 두 번 더 해야 한다. 이걸 지금 해버려? 놔뒀다가 더 나오면 한꺼번에 해버려? 싱크대는 좁아터져 쌓아두려니 눈에 몹시 거슬리고 당장 해버리려니 엉덩이 붙이고 좀 쉬고 싶고. 다음 끼니때가 올까 벌써부터 두려워진다. 주말에는 아빠가 요리사니까 남편에게 점심때는 짜장라면이라도 삶으라고 시켜야겠다.

날마다 같은 시각에 일어나고, 세 끼 밥을 해결하고, 늘 하던 일을 하고, 항상 만나는 사람을 만나고, 비슷한 시각에 잠을 자고, 다음 날 또 눈을 뜨고. 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은 똑같은 것의 반복이며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다. 틀에 박혀 의미없이 돌아가는 일상을 잘 견뎌내기란 쉽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반 백 년이 다 돼 가는 내 인생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숙제이자 과업이었다. 철없던 시절에는 공무원이나 교사 같은 직업을 혐오했다. 같은 장소로 출근해 날마다 비슷한 업무를 재미도 없이 해내야 하는 사람이나, 지루한 교과서로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안 돼 보였다. 철이 좀 든 현재는 한결같이 묵묵히 이런 일을 감내하는 사람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자리에 거저 앉혀준대도 여전히 손사래를 칠 것 같다.

지금껏 나는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고 다소 찌질해 보이는 일상을 어떻게 이겨내며 살아왔을까? 언어재활사 20년차라는 경력을 어떻게 쌓아 올릴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새로움을 추구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욕심없이 자족하며' 살아서 가능했다. 언어재활사로서 일주일에 열 명의 아이들을 만난다. 오늘은 이 아이와 어떻게 즐겁게 수업을 할지 매순간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아이의 반응은 매번 다르니 새롭고 나와 작은 교감이라도 생긴다면 그 수업은 성공이다. 감사하게도 언어재활사라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보람 찬 일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난 뒤 뿌듯함으로 마음이 가득 차 오른다면 의미있는 하루를 보낸 것이다. 사흘만 일하는 프리랜서라서 수입이 적다고 불평하는 대신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아 만족한다.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고, 가끔 글도 쓰고, 산책도 실컷 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돈보다 값지다.

정의당 이정미 의원이 쓴 정치산문집 『정치의 의무』에 이런 글이 있다.
노회찬 의원의 지역구는 창원이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 서울과 창원을 왕복할 정도로 강행군의 나날을 보내셨다. 매일 밤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물었다. “대표님,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결하세요?” 그때 노회찬 의원이 했던 대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 의원, 굉장히 힘들죠. 하지만 어떤 잠깐의 기쁨의 순간이 있어. 그 맛에 견뎌.”

언어재활사라는 내 직업에 반해, 가정에서 아내나 엄마로서 일상을 잘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멋쟁이 노회찬 의원에게서 통찰을 얻는다. 급하게 대충 만들었으나 조금 정성이 들어간 김치볶음밥을 잘 먹는 가족들을 보며 잠깐 기쁨이 스쳤다. 그 순간이 주는 그 맛에 오늘도 일상의 찌질함을 이겨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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