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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중한날의꿈 Dec 24. 2019

열 살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유민아, 엄마가 살면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야기 들려줄게.

니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야. 하루는 엄마가 꿈을 꿨는데 두 번째로 존경하는 분이 나왔어. 참 내가 이 얘기 안 했던가?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우리 아버지, 그러니까 네 외할아버지고 두 번째로 존경하는 분은 노무현 대통령이야. 그 대통령이 내 꿈에 나왔어. 그리곤 숫자 6개를 불러줬어. "16. 8. 23. 28. 5. 41. 35" 이런 식으로. 잠에서 막 깨서 눈을 뜨자마자 그 숫자를 소리내어 말했어. 근데 정신을 차리고보니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 숫자는 로또 번호였는데 말야. 로또가 뭐냐고? 당첨되면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받는 거야. 지금 생각해도 그 꿈이 신기하기만한데 숫자를 기억 못 한건 아깝단 말야. 그때 번호만 잘 적어뒀다면 나 지금이랑 다른 인생 살게 됐을지도.

또 한 번은 니 언니가 세 살 쯤 됐을 때야. 엄마, 아빠, 고모, 언니랑 넷이 포항 북부해수욕장에 놀러를 갔어. 동해 바다는 바닷빛이 짙푸르거든. 그래서인지 언니가 바다를 무서워해서 물에 살짝 손만 담가 봤어. 주변을 둘러보는데 '뽑기'가게가 보였어. 너도 뽑기 알지? 엄마가 막대를 판 위에 이리저리 놓고 뽑기 종이 한 장을 뽑았지. 종이에 쓰인 번호를 맞춰보니 어라, 잉어라네. 단번에 1등에 걸렸어. 우리는 소리 지르며 환호했고 주인 아저씨는 황당한 얼굴을 하더라. 칼, 기타, 거북, 총 등등 매달려있는 상품 중 가장 큰 잉어 한 마리가 내 손에 턱 들어왔지. 빨간 옷을 입은 엄마가 투명한 황금빛 잉어를 들고 조금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찍은 인증 사진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야. 어때? 엄마 대단하지?

이번 얘기는 최근에 일어난 일이야. 엄마가 좋아하는 동네책방 <디어마이블루>에 갔을 때 있었던 이야기야. 책방에서 무슨 책을 살까 둘러보다가 제주 관련된 책에 눈이 갔어. 제주에 살면서 제주가 더 궁금해져서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책을 샀지. 서점 대표님과 잠시 이야기 나누곤 테이블에 앉아 새로 산 책 표지랑 저자를 보면서 책을 훑어 보고 있었거든. 조금 뒤 어떤 남자 분이 서점으로 들어오더라. 그분이 내 앞에 서더니 책이랑 나를 번갈아보며 웃더라구. 그때 대표님이 "어머머, 이 책 저자가 눈앞에 나타났네요."하는 거야. 엄마가 읽고 있던 책을 쓴 사람이 바로 그 남자였어. 우리 셋은 신기했고 놀라웠지. 엄마는 저자한테 사인을 받았고 대표님은 그런 모습을 사진에 담았어.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우연은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 같아.

지금까지 들려준 세 가지 이야기는 신기한 경험 같은 이야기였지? 이번에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야.

엄마가 니 나이였을 때 있었던 일이야. 초등학교 3학년, 그때는 국민학교라 불렀지. 그때 학교에서 처음으로 우유급식을 하게 됐어. 지금처럼 모두에게 무료로 우유를 주는 게 아니라 신청을 하고 돈을 내는 사람한테만 우유를 줬어. 나랑 친했던 친구들은 모두 우유급식을 하는데 난 못했어. 할아버지가 안 된다고 했거든. 엄마는 떼를 쓰고 졸랐지만 소용 없었어. 반에서 공부도 어느 정도 하고, 요즘 말로 인싸에 속하는 애들 그룹에 내가 끼어 있었어. 그런데 그 중 나만 우유를 못 먹으니 그게 자존심이 상했던 거야. 그때 내 위로 5학년, 중2, 고1, 고3 언니, 오빠가 있었으니 가정 형편이 오죽 힘들었겠니? 급식 허락을 못 해 줬던 할아버지 마음도 많이 힘들었을 거야. 근데 그때는 왜 그렇게 서럽던지. 뭐? 넌 우유 먹기 싫어서 급식 안 했음 좋겠다구?   

하나 더. 엄마가 중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이야. 우리 반 담임은 무용선생님이었고 반 애들은 60명 조금 넘었어. 한 학년에 열 반이 있었으니 꽤 큰 학교였지? 2학기 중간고사를 봤는데 우리 반이 1학년 열 반 중에서 꼴찌를 했어. 담임이 엄청 화가나서는 1등부터 꼴찌까지 등수를 교실 앞에 붙여 놓고, 성적 순서대로 자리를 앉혔어. 맨 앞줄 왼쪽부터 1등이랑 꼴찌랑 짝이 되고, 그 옆에 2등이랑 꼴찌서 두 번째가 같이 앉고 이런 식으로. 엄마는 어디 앉았냐고? 당연히 맨 앞줄에 앉았지. 안 믿긴다고? 흥. 삽시간에 우리 반은 전교생들의 구경거리가 됐어. 누가 몇 등을 했는지, 이 반 꼴찌는 누군지, 꼴찌반 애들은 어쩌고 있나 싶어서 죄다 구경을 온 거야. 쌤 진짜 너무 했지? 그렇게 몰상식하고 비교육적인 방법을 쓰다니. 학생 인권이고 뭐고 그때는 아무것도 아닌 시절이었어. 지금까지 내가 후회되는 건 말야, 왜 아무 말 못 하고 당하기만 했을까 하는 거야. 전지에 커다랗게 써서 붙여 놓은 순위표를 찢지는 못할 망정 선생님한테 건의 한 마디 왜 하지 못했을까 싶어. 너라면 어떻게 할래? 뭐? 청와대에 국민청원 넣겠다고?

유민아, 엄마가 겪은 일들 가운데 어떤 이야기는 떠올릴수록 기분 좋아지기도 하고, 또 어떤 이야기는 마음 아프기도 해. 일생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하는 일들이 내게 일어난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그때 그 일을 겪으면서 후회되게 행동한 내가 부끄럽기도 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기쁘고 슬픈 이야기들이 많아. 그런데 말야, 이런 특별한 이야기로만 우리 삶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더라. 인생의 많은 부분이 기억에 남지도 않는 평범한 순간들로 채워져.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순간을 잘 견디고 묵묵히 살아내면 또 어느 날엔가 오래도록 기억 남을 일들이 생기는 것 같아. 그 일이 기분 좋은 일이라면 순순히 즐기면 될 테고, 반대라면 저항할 줄 아는 힘을 제대로 쓰면 되겠지. 자, 오늘도 밥 잘 먹고, 숙제하고, 목욕하고, 피아노 연습도 조금 하고 그렇게 잘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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