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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ent books Apr 17. 2021

불완전함 수용하기

불완전함 수용하기



잠자리에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미처 온전히 닫지 못한 커튼이 신경쓰여서이다. 일어나서 커튼을 제대로 해놓고 돌아왔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잠이 들지 않는다. 책장 위에 꽂혀있는 책 중 하나가 삐죽하게 앞으로 나온 것이 도저히 신경쓰여 못견딜 지경이다. 마지막으로 하나씩 신경쓰이게 하는 것들을 점검해본다. 가스 중간 밸브는 잠갔는지, 보일러는 '외출'로 돌려놨는지, 그리고 출입문 안전고리가 제대로 채워졌는지 생각해본다. 결국 다시 일어나서 이 모든 것들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든다. 세상에 적지 않게 존재하는 어느 편집증적 인물의 흔한 잠에 들기 전 모습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나는 얼마간 편집증적 경향이 있음을 인정한다. 편집증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여러 가지 경우들이 있을 텐데, 아마 천천히 떠올려서 리스트로 나열한다면 여기에 충분히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몇 가지 어린 시절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규칙으로 세웠던 편집증적 사례를 언급해보고자 한다.  




- 걸어가면서 특정 색상이나 문양의 보도블록을 오른쪽 발로만 밟고 지나간다.   

- 조금이라도 더러운 것에 손을 대었다는 생각이 들면 몇 번이고 흐르는 물에 손을 씻고선 바지에 닦는다.

- 새로 산 책을 펼쳐서, 새 책 특유의 종이 냄새를 맡고 손상된 부분은 없는지 모서리와 내지 등을 살핀다. 

- 책상에서 무언가 하고 있을 때 수차례 자리를 정리정돈하고, 책상 위 물품 위치를 각을 맞춰 재배치한다. 

- 책장의 책을 크기, 제목, 장르, 색상 등 각종 기준에 맞추어 정리한 후, 다시 다른 규칙에 따라 재정리하는 일을 반복한다. 

- 옷장에 걸려있는 셔츠를 비슷한 색상과 패턴끼리 모아 어느 것 하나 비뚤게 나와 있지 않도록 정리한다. 

- 서랍을 열었다 닫았을 때, 생각보다 세게 닫았다는 생각이 들면 잘못을 고쳤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다시 몇 차례 약하게 열고 닫는 일을 반복한다(다른 여러 물건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행동한다). 

- 지갑에 지폐를 넣었을 때, 특정 지폐가 비뚤게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꺼내서 반듯하게 정리한 후 지갑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한다. 

- 지갑이나 가방에서 현금이나 물건을 꺼냈고 넣었을 때, 반드시 뒤돌아서 물건이 떨어지지 않았나 살펴본다. 

- 어떤 사건이 일어나길 앞두고 있을 때 10부터 시작해서 0까지 숫자를 세는데, 그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타이밍에 맞추어 숫자간 세는 간격을 조정해서 센다. 




위에 나열한 것들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편집증적 증세 중 일부만 적어놓은 것이고, 이중에는 여전히 꽤나 여러 습관들이 현재까지도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잔존하는 것도 있다. 불행할 정도로 스스로를 옥죄는 바보 천치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때는 특정 편집증적 행동에 빠져나오지 못해, 도저히 해야 할 다른 일로 넘어가지 못하고 그 행동을 '완전히 완수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몰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편집증적인 사람을 아주 관대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때,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이런 사람들은 작은 일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 일어나는 작은 사건과 현상 하나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가 있다. 색상이 독특한 구형 차 하나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봤을 때, 기묘한 모양의 구름을 걸어가다 발견했을 때 미묘한 감상의 순간으로 빠져들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이러한 평가는 그야말로 실제로 특정 사물과 현상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나고 섬세한 과학자, 혹은 예술가적 기질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평가라고 봐야 할 것이다. 편집증적 환자 중에 그러한 과학자나 예술가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역은 반드시 성립하는 조건이 아니다. 편집증은 분명하게도 우리네 삶을 매우 피곤하고 고단한 노동의 연속으로 만드는 불행한 습관에 가깝기 때문이다. 



    




비문증은 편집증과 함께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보인다. 특정 현상에 예민하게 인지하고 집요할 정도로 어떤 행동에 집착해서 반복하는 사람에게 다가온 비문증은, 그렇지 않아도 주 52시간 근무에 허덕이던 노동자에게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단축시키지는 못할 망정 주말까지 나오도록 해 견뎌낼 수 없는 강도의 노동을 더하는 것처럼 잔인하다. 편집증과 비문증의 콜라보는 하나의 인격의 안위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자연스러운 활동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제한시킨다. 그 불행한 영혼은 오늘 자기 전에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책 한 권에도 신경이 쓰여 전전긍긍하는 사람인데, 그의 시야에 온갖 벌레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눈앞에 있는 사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도대체 얼마나 더 불행해질 것이란 말인가. 


결국 비문증 이슈는 어떤 현상에 대해 얼마만큼 스스로가 물리적으로, 신경학적으로 무심하고 무뎌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수렴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 가졌던 여러 편집증적 증세를 성장하면서 다른 어떤 '온건한' 형태의 습관으로 환원시키며 극복하거나 애써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제해버리며 살아왔다. 편집증은 특정 '신경쓰이는 대상'에 대해 무심해지는 노력을 통해 극복이 가능한 것이다. 


비문증은 '놀라움-짜증-두려움-좌절'의 감정적 변화 가운데 경험되어지고, 이는 이를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는 엄청난 노력과 신경학적인 적응에 의해 부분적으로 극복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가장 편집증적인 성향을 극대화시키는 요소이지만, 결국 이를 극복하는 것도 편집증을 극복하는 메커니즘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무심해지는 노력을 통해 극복하는 문제 -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사실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삶에서는 많이 노력한다고 해서 어떤 일에 쉽게 무심해질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이 존재하기에 그렇다.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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