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억에서
어린 시절 추억 속에서 풍경이 주었던 인상을 떠올린다.
우리집은 여행이나 피크닉을 자주 가는 집안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차지하는 지배적인 인상은 서울의 골목길과 놀이터, 낡은 벽돌집과 콘크리트 담과 같은 것이다. 배관 공사를 앞두고 거리에 길게 깔아놓은 콘크리트 기둥 속을 기어다니며 아지트 삼아 놀았던 기억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정겨운 시골 속 풍경의 인상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 설날에 외할머니댁에 놀러갔을 때의 기억이다. 거대한 절벽 아래 호수가 완전히 얼어붙어 있다. 사촌들과 썰매를 만들어서 그 위에서 놀았다. 사람이 위에서 뛰고 놀아도 안전할 만큼 호수가 얼었다는 것이 당시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을 것을 방증하는 것이겠지만, 놀랍게도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뛰어놀았던 기억 속에서는 추위에 대한 느낌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어린 시절의 자연은 변하지 않는 견고한 무엇, 언제나 맘 편히 놀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는 무대 그 이상의 의 의미는 없었다. 안정감 있는 SSD 하드웨어와 같은 자연 속에서, '어떤 놀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작동시켜 최대한의 효과적인 재미를 달성할 수 있느냐가 그 시기 아이들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다.
단순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기에, 그것에서 어떤 섬세하고 다층적인 의미를 찾아내기 힘들었다. 아이러니다. 그 어린 시절이야 말로, 지금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거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인상을 두 눈 가득히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맑은 눈은 절벽과 호수의 어울림, 미세먼지 없는 청량하고 맑은 하늘, 얼어붙은 호수면에 부서지듯 반사되는 햇빛의 아름다움을 깊게 탐미하지 못하고 놀이의 규칙이 주는 흥분과 승부심의 쾌감을 좇는 데 푹 빠져 있는 것이다.
2. 특정 목적으로서
한국인이라면 산이라는 존재와 완전히 떨어져 살아갈 수 없다. 학창 시절 '극기훈련'이라는 이상한 교과상의 프로그램을 이수하기 위해서 수백 명의 학생들은 대절버스에 몸을 싣고 강원도 산골짜기 같은 곳으로 들어간다. 자연 속에 들어가 심신을 단련하고 리프레시한다는 명목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은 과자 봉지와 양말 같은 곳에 숨긴 담배를 가장 맛있게 피고, 용케 특정 용기들에 숨겨온 술을 밤늦게 마시다가 교관에게 들켜서 밤새도록 기합을 받는 일정을 소화한 후, 마지막날 모닥불을 피워놓고 부모님을 떠올리며 의식적인 눈물을 쏟고 오는 일련의 드라마 하나를 찍고 오는 행사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여기에서 자연이 주는 의미라고는 특별히 없다.
종교인들은 '산상기도'라는 이름으로 산 밑에 있는 기도원에 들어가 굴 같은 것을 파고 들어가 기도한다. 혹은 굴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곳에 들어가 돌을 쌓고 각종 종교적인 장식들로 공간을 꾸미고선 기도를 드린다. 영험한 산 속에서 이들 신자들의 기도를 들은 신은 기도 내용들을 취합해서 정리할 때 무척이나 고민스러울 것이다. 시험에서의 일등과 로또 당첨과 특정 기업의 수주 달성은 한정되어 있는 것인데, 도대체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고 누구는 들어주지 않아야 한단 말인가. 산과 자연은 숭고하며 영험한 곳이기에 종교적인 공간들이 몰려있거늘, 그곳에서 울려퍼지는 기도의 내용들은 그야말로 속되다. 철저히 세속적이다.
군대에서의 자연은 고통이다. 눈과 더위, 산과 고개, 들판과 하천 모든 것들이 짐스럽다. 아름답지 못하다.
군대에서 자연은 '지형지물'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가장 총에 덜 맞을 수 있는 공간에 참호와 벙커를 만들고, 가장 적을 공격하기 쉬운 시계 확보가 용이한 곳을 찾아 몸을 숨기고 하릴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러나 왠지 나는 모든 작전이 끝나고 부대로 복귀할 때 그 자연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봤던 기억들이 여럿 남아 있다. 자연은 부대라는 공간과 사회라는 공간의 중간지대와 같은 공간이다. 이곳을 거쳐 나가 터미널로 향하고,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 나의 원래의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 자연은 군인들에게 너무나 남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몸을 고되게 하는 모든 일들이 발생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군인들은 그곳에서 자유와 희망을 엿본다. 우리는 언젠가 자유의 몸을 이끌고 이 공간들을 걸어나갈 것이다...
대한민국에서의 모든 산악동호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목적성이 결코 훌륭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이다. 사람들은 산 정상까지, 혹은 그에 준하는 어떤 목표점에 도달한다는 것의 명목 아래 각종 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한다.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임, 혹은 사내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모임들이다. 군대에서 이미 많이 마모된 무릎을 다시금 갈아가며 산을 오르락내리락한 후 결국 진한 술잔치로 마무리한다. 시내에 있는 포차에서 마시는 술과 다른 유일한 점이라면 좋은 공기를 마시며 술을 마셔서 좀 덜 취한다는 점 정도이다.
3. 미술에서
고대인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이집트인의 미술에서는, 결코 있는 그대로의 사람이나 자연의 모습을 그리는 데 중점을 두지 않았다. 모시는 신이 지닌 특징 모두를 한눈에 보여주기 위해, 눈은 정면, 다리는 측면, 팔과 몸체는 정면과 같은 형태로 인체공학적으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모습을 구현했다. 중세 시대의 이콘(icon)화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어떤 경건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복음서나 성경의 말씀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바로 그 종교적인 목적성에 충실한 형태로 그림이 그려졌다. 그렇기에, 인간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자연을 담아내는 일은 매우 부차적인 일이거나 애써 신경쓰지 않아도 될 요소였다.
곰브리치 식의 표현대로 한다면, 미술에서의 '자연의 정복'은 르네상스 이후로 서서히 진행되어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시대에 완전히 달성하게 되는데, 이 일련의 과정을 요약하자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론의 추구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에서는 그리스 시대의 가치를 재발견했다. 인체의 아름다움과 수학적인 비율, 자연에서의 원근법이라는 '관점'의 미학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네덜란드와 같은 북유럽 화가들은 인간이 아닌 자연 풍경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실적인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실내에서는 사진으로 찍은 듯한 정물화를, 야외에서는 멋진 범선과 파도를 표현해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의 효과에 의해 인간이 실제로 시지각적으로 인지하는 자연의 인상을 표현하는 방법에 주목했다. 우리 훌륭하신 안과 의사 선생님이 끊임없이 되새겨주신, 나의 '하찮은' 비문증이 아닌 병리학적인 큰 문제가 되기에 진정으로 조심해야 하는 바로 그 녹내장에 걸린 모네는, 말년에 이미 현대미술에 근접한 추상적인 풍경화를 완성하게 되는데, 바로 이 정도 시점까지를 '자연의 정복'이 완성된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정복하고 싶은 대상일 것이다. 그 정복은 경제학적인 이해관계에 따르면 식민주의적 체제와 관련된 어휘일 것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는 "충만하고 번성할" 공간적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자연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범주 안에 들어와야 인간에게 편안함을 제공해주는 대상이 될 것이다. 예술은 시각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관점과 인식의 차원에서 자연을 인간의 통제 영역으로 가져오는 일에 일조한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의 눈(관점)으로 가져와서 우리가 보고 싶고, 보이는 그대로의 자연을 인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의 한 형식이다.
4. 꿈에서
꿈에서 나는 성취하지 못한 욕망을 충족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러나 꿈에서도 언제나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다.
어떤 성: 성 주위에 나무와 돌과 하천이 있다. 그곳을 다 극복해서 성에 도착해야 하는데, 생각만큼 일이 수월하지 못하다. 어떤 진흙길을 지나가는데 계속되는 달음박질에도 한 걸음조차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오늘 하루종일 걷고 뛰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처음보다 더 뒤에 위치한 것 같다.
비옥한 땅: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내가 가진 것들을 계수하고 경영하는 계획을 세운다. 비옥한 땅을 경작하고 농작물들을 거두어들이려고 하는데 벌레들이 잔뜩 생겨났다. 모든 농작물들을 먹어치운다. 팔을 들어봤는데 팔 한 가득 진물 가득히 검은 염증이 점점히 박혀서 부풀어오르고 있다.
아름다운 하늘: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날아오르듯이 뛰어오른다. 너무나 청량한 하늘이다. 그런데 눈에 검은 점들과 지렁이 같은 형체들이 시야를 가리고 이리저리 움직인다. 너무나 흉측해서 닭살이 돋아오른다. 계속 눈에서 치워내고 흰 구름과 푸른 하늘을 바라보려고 하는데 결코 없어지는 일이 없이 계속 내 시야를 따라다닌다. 부정적인 의사표시를 하며 소리를 지른다. 잠에서 깨어난다.
5. 층이 있는 풍경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풍경을 즐기는 삶이 내 유일한 목표이다. 이것은 아래의 조건들을 전제하고 있다.
1) 나는 먹고 사는 것에 더 이상 큰 어려움이 없는 재정 수준을 갖추었다.
2) 나는 자연에서 나와 가족의 안위를 보전할 만큼의 신체적인 여건을 유지하고 있다.
3) 나는 사회생활의 단절이 괴롭거나 두렵지 않다.
4) 나는 '자연적인' 삶에서 내가 즐겨하는 활동을 충분히 영위할 수 있다.
이런 전제가 충족되는 한 나는 오늘이라도 훨씬 조용하고 사람이 적은 교외 지역으로 나가 살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월든>보다는 조금은 더 사치스럽게, 그러나 방송에서 나오는 연예인들의 전원주택보다야 훨씬 소박한 형태의 생활 조건이면 좋겠다.
나는 여기서 언제나 마음속 깊이, 꼭 하나의 조건이 더 충족되길 어린 시절부터 간절히 기도해왔다. 기도를 드린 장소는 때때로 산 속 기도원이기도 했고, 훈련을 위해 기동한 작계 벙커이기도 했고, 윌리엄 터너의 풍경화 작품 속의 어떤 해변가를 눈으로 좇으며 기원했던 어떤 미술관이었기도 했다. 바라는 바는 한 가지, 온전한 눈으로 그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풍경들을 평면적으로, 아주 단편적인 스냅샷처럼 어떤 정보들만을 머릿속으로 가져오고 그 풍경 자체의 아름다움을 세밀하게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온 시기 이후부터, 나는 내 눈에 풍경의 연속된 흐름과 층층이 레이어들이 더해지면서 변화하는 아름다운 인상들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큰 괴로움에 시달렸다. 자연의 풍경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은, 단순한 활자를 독서하는 데 느끼는 어려움이나 컴퓨터 모니터 속 부유물의 움직임을 인식하는 정도의 불편함과 고통에 비할 바 못 되는 매우 큰 괴로움이다. 그 하늘과 바다, 하얀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가를 있는 그대로 느껴보고 싶다.
나는 그래서 언제나 꿈속에서도 어떤 장면들을 향해 반드시 도달해보려고 하고 완전히 있는 그대로의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발악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꿈에서 깨면 매우 나는 지쳐있다. 주로 미명 때의 어스름함 속에서 깨어나곤 한다. 미세한 불빛이 창문으로 흘러들어오고 내 눈이 이것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내 눈이 이것들을 인지할 수 있는 상태로 아직 기능하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신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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