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알지 못하는 길
한국인들이 삶의 목표와 진로 설정의 시기를 늦게 경험한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저주 받은 그 학창 시절에, 가장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삶을 살아가며 부여된 학업의 성과를 가장 묵묵히 수행하기만 하면 모범적인 행동으로 인정 받는 바로 그 학창 시절을 끝내고 나서야 한국인들은 자신의 미래를 새로운 눈으로 응시하기 시작한다. 한국인의 학창 시절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질풍노도'의 경험이 결여되어 있다. 괴테 식의 질풍노도처럼 자연과 낭만적 요소,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건강하고 솔직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는 시기를 살면서 반드시 지나치기 마련일텐데, 우리는 (편차는 있지만)다소간 늦게, 생각지 못한 순간에 슬며시 내면의 질풍노도를 인지하게 되고 곧 이어 해일같은 충격으로 깊숙이 경험하게 된다.
스스로 '너드'(Nerd)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지만(그리고 그것이 주는 정형화된 모습처럼 심한 공부벌레나 덕후도 아니었지만),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선배들과의 첫 자리에서, 분명히 내 속에 '너드'의 전형성이 웅크리고 있던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래 대화는 프로이트 서적에서나 볼 법한 그런 이상한 환자의 상담 사례와 흡사해 보인다.
선배: 우선, 앞으로 종종 만날 일이 많을 테니까 휴대폰 개통을 빨리 하는 것이 좋을 거야.
나: 선배, 저는 휴대폰을 사서 거기에 매몰되는 습관을 들이고 싶진 않습니다. 휴대폰을 사고 통신비를 낼 돈으로 차라리 지금 꼭 사고 싶었던 <도스또예프스키 전집>(열린책들 발행 버전)을 사려고 합니다.
선배: 그럼, 어떻게 연락을 하고 지낼 수 있을까?
나: 지금껏 휴대폰을 사용 안 하고도 충분히 잘 지내왔잖아요. 그런 것에 쓸데없이 돈을 쓰는 것이야말로 반드시 피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선배: ...
돌이켜보건데, 고등학생 때의 나는 문학에 있어서 헛물을 켜는 일들의 반복으로 인해 약간의 콤플렉스와 어떤 편집증적인 증상이 생겨난 듯싶다. 당시 나는 카프카를 무척 좋아했던 동기와, 그만큼은 아니지만 괴테와 독일문학을 흠모하는 다른 동기와 함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교지 편집부원으로도 활동했는데, 당시 나는 학내에서 문학에 있어서는 정말 일가견이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 간주했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어떤 객관적인 지표를 바탕으로 선정되었는지 모르겠지만)학교 대표로 백일장 대회 같은 것을 같이 나가게 되었는데, 나는 그날 미처 글 하나를 완성도 짓지 못한 채 원고지를 제출하고 나왔다. 스스로 형편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비문증은 이 시기부터 문학적으로 승화되는 대상 중 하나로 활용되었다. 어떤 날은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눈에 떠다니는 망할놈의 부유물을 쫓느라 아무 소득 없이 책상머리에 앉아 있다가 하루를 보낸 날도 있었다. 거지 같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삶을 완전히 포기하진 못하고 배가 고파지는 2교시 이후 쉬는 시간에 매점에 가서 '사라다빵'을 사먹으면서 살아있음을 다시금 느끼고 자리로 돌아오곤 했던 기억이 난다.
독일문학이나 도스또예프스키는, 삶의 어두운 단면이나 부조리한 측면들을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생활의 원천이 되곤 했다. 당시에 셰익스피어를 읽었다면 보다 유쾌한 방식으로 내 비극을 승화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들 문학에의 탐닉이 새로운 삶의 원천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질풍노도를 경험했다. 정말로 미래에 대한 예측이 어려웠다. 결코 앞길이 쉽지 않을 전공 선택, 군입대와 이중전공, 옷차림과 걸음걸이, 돈이 없어서 해야 하는 아르바이트 개수, 반드시 피하고 싶은 멍청한 대학축제 등 모든 것이 나를 압박하는 신경질적인 요소로 다가왔다. 앞으로 혼자서 극복해야 할 바로 그 무서운 '자유'가 오히려 삶의 큰 짐으로 다가온 셈이다. 아, 카프카는 돈 없고 어두운 표정의 대학생에게 당장에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삼성 휴대폰으로 선배에게 밥을 사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대학교 3학년 이후로 비문증도 점점 심해졌다. 이때 나는 비문증의 현상으로부터 병리학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있는 부분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망막박리가 의심된다는 진단을 처음으로 받은 것이다. 레이저 시술을 받았다. 많은 눈물과 광시증 같은 현상이 뒤따랐다. 비문증은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의사 선생님 진단의 초점은, 안과학적으로 실명이나 통증 등의 신체적인 기능상 문제 발생 여부이다. 비문증의 심화는 레이저 시술에 따른 부가적인 효과인 것이지 그것 자체가 다른 병리학적인 문제의 원인은 아닌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망막박리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레이저 시술을 잘 마친 것이고 그것으로 일단 안심인 것이다.
아직도 대학생 때 무거운 가방과 노트와 함께 강의실과 학생 식당, 동아리방을 오가며 바라본 교정의 인상들이 많이 남아있다. 더욱 신경질적으로 변한 성격으로 언제나 다급히 걸음을 옮기며 눈으로는 부유물을 열심히 쫓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많은 좋은 사람들과 가진 좋은 추억들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지만, 반대로 나는 비문증이 보다 진중하고 무거운 의미로 내게 다가온 그 대학생 후반기의 인상 또한 또렷히 남아 있다.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고 나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내면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타인에게 인정 받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고개를 들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불행한 눈을 가지고 어떻게 미래를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방황했다.
<이미지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