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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ent books Jan 31. 2022

정전

정전


갑자기 불이 나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누전차단기(두꺼비집)가 내려간 것이다. 한순간 어둠이 찾아왔다.

이 불행의 순간을 나는 샤워 중 맞이했다. "화장실 등이 나갔구나." 처음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그러나 곧 잘못 안 것임을 깨달았다. 화장실 문을 열고 밖을 나가보는데, 집안이 온통 어두운 것이다. 정전이었다.


아내가 말하길, 누전차단기가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불이 모두 나갔다고 한다. 가족 모두가 여러 가지 가설을 내놓았다. 아무 이유 없이 차단기가 내려가진 않으니, 분명 어디선가 누전이 되었든가 아니면 하나의 멀티탭에 과전류 사용으로 일어났을 것이라는 얘기들이다. 집안 구석구석 문제가 될 여지가 될만한 곳들을 점검했다. 특별히 문제가 될 부분은 없어 보였다.

  

다시 차단기를 올리고 두 시간을 보냈다. 별다른 일이 더 없기를 바라며 각자 할일을 하고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나눴다. 갑자기 일어난 특이한 사건처럼 여기기로 했다.


두 번째로 차단기가 내려갔다. 이제부터 공포다. 분명 이건 집안 전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벽 한 시에 굉장한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두 번째로 차단기를 올리고, 집안에 쓰지 않는 가전제품이나 멀티탭을 오프하고 어려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일어나서 바로 조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자리에 누운 지 십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 번째로 차단기가 내려간 것이다. 모든 가족이 공포에 떨었다. 일단 오늘 밤을 보일러도 없이, 그리고 불 하나 없이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그 불편함을 고작 반나절도 안 되지만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집안에 초를 허겁지겁 찾아(조그만한 향초가 두 개 있었다) 피우고, 랜턴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나가서 편의점에서 성능은 떨어지지만 비싼 작은 랜턴 하나를 사왔다.


랜턴 하나 사들고 집에 들어와 있는데, 아내가 소파에 앉아 작게 빛을 발하며 어지러운 향을 내뿜고 있는 향초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씁쓸하고 걱정 가득한 표정이 불빛의 움직임에 따라 눈앞에 어른거렸다. 줄곧 집주인을 욕하고 있었던 듯싶은데,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은 변기며 도어락이며, 이사올  갖가지 제대로 조치되어 있지 않은 생활 필수 시설의 문제로 이미 굉장한 고생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집주인은 싫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잠자리에 들면서 기도했다. 제발 내일 아침 전기를 봐줄 수 있는 업체가 문을 열었기를(일요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코 큰 공사가 필요한(매립되어 있는 배선을 새로 손봐야 한다든가 하는) 일이 아니기를 기도했다. 인터넷을 살펴보니, 가장 이상적인 케이스는 '누전차단기의 노후화로 인한 교체'였다. 바로 그 케이스이기만을 바랐다.


어떻게 어떻게 잠이 들었지만, 밤새 잠자리를 뒤척였다. 꿈에서는 심지어 전기 공사를 하는 꿈도 꾸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내게 쏟아지는 것 같은 억울함이 잠자리의 내 무의식을 지배한 듯했다. 꿈에서는 어릴 적 비가 많이 와 정전되었을 때마다 사용했던 크고 네모낳고 빨간 랜턴도 나왔다. 아주 정직하게 네모난 배터리가 들어가는 바로 그 랜턴이다. 크기와 무게감에 비해 밝기가 현저히 떨어진, 지금 내 손안의 아이폰 라이트보다도 흐릿했던 그 랜턴이 머릿속에 소환되었다.


아침에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근처 전파사에 연락했다.






다행히 집 근처에 오늘 영업하는 전파사가 있었고, 늦지 않은 시간 집에 그곳 사장님이 방문하여 점검해주었다. 누전 상황은 발견되지 않았기에 차단기만 교체했다. 프로덕트 넘버를 보니, 2002년식이었다. 노후화의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되었다.


누전기를 교체하고 만 하루 째, 이렇게 이 글을 써보고 있다. 아직까지 이상이 없다는 사실에 한숨 돌리고 있다. 고작 정전이었다. 전기 공급을 담당하는 주요 시설(사실 시설이라기보다는 작은 부품) 하나의 문제였을 뿐인데 온 가족이 패닉에 빠졌었다. 얼마나 우스운가. 우리는 정말 전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화장실에서 빛이 전혀 없이 볼일을 봐야 한다는 사실만큼 끔찍한 것도 없었다. 폰을 한 손에 들고 볼일을 보는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더듬거리며 한 발씩 대딛으며 별로 넓지도 않은 집안을 살피며 돌아다녀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촛불 하나 거실에 두고 주변을 밝히면, 그나마 내 옆에 있는 사물과 사람의 위치가 모습을 드러내고 무지의 두려움이 걷혀 용기를 내 보이는 것들을 통해 뭐라도 해볼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날 밤, 아내의 폰은 충전을 미리 안 해놔서 배터리가 20%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행여나 내일 수리 시간이 길어지게 되면 전화 사용이나 인터넷 검색도 못하게 된다는 불안감으로 어떻게든 충전을 하고 싶었다. 나는 내 노트북에 충전 케이블을 USB 단자로 연결하여 아내 폰을 충전해서 45%까지로 만들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여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우리는 폰이 방전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심리적 지경에 이르게 돼버린 것이다. 얼마 전 본 좀비영화나 <돈룩업> 같은 재난영화의 상황이 연상된다. 별생각 없이 사용하던 물건이나 시설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는 너무나 사용이 갈급하고 생존에 절대적인 존재처럼 다가오게 된다.


빛, 그리고 물건을 작동시키는 전기가 가장 필수적인 존재들이다. 우리집의 노후화된 누전차단기가 새삼 되새겨준 귀중한 사실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훈적 사건은 또 한번 우리집에서 일어나진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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