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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ent books Jul 24. 2022

잃어버린 감각들 3

삶에 스며들지 못하는 소리

삶에 스며들지 못하는 소리



1. 소음들


소리는 있지만 음율은 없다. 쓰레기나 잉여 물건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실존의 공간들을 가득 채우는 소음들.


길거리의 핸드폰 판매 대리점들은 여전한 90년대 판촉 스타일을 고수하며 외부 스피커에 '질질 짜는' 음악이나 최근 유행하는 대중음악을 정도를 넘어선 데시벨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지하철과 기차,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 내부에서는 여전히 많은 노인들이 휴대폰을 진동으로 바꿔놓지 않고 거침없는 트로트 전화음을 울려댄다(게다가 소리가 나자마자 바로 받는 것이 아니라, 케이스를 열어서 한참을 전화 온 상대방의 이름을 보고는 손가락 하나로 슬라이드를 해서 큰소리로 전화를 받는 것이다). 선거 시즌이 되면 유치한 CM송을 만들어서 유세차량을 사방의 도로로 운영하면서 귀를 괴롭게 만든다. 다른 후진국들도 아직 이렇게 선거 유세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가장 많이 방문하곤 하는 광화문 일대는 언제부터인가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이스라엘 국기(?)를 같이 들고 다니면서 규정 범위 이상의 데시벨로 앰프를 틀어놓고 정치적 행위를 하는 사람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천벌을 받아 지옥에 갈 것이라는 설교와 통성기도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그들에게는 아쉽게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하는 정도로 미루어봤을 때 지옥으로 가는 길에 그들이 더 근접해 있어 보인다).


대한민국 소음 공화국이다. 이는 여러 외국을 다녀온 사람들의 수많은 증언과 기록들, 그리고  자신만 해도 미국과 일본 등의 방문 경험에 미루어봤을  확실하다. 우리나라는 거리가 가장 시끄러운 나라이다.  때는 매장들마다 외부 스피커로 대중음악을 틀어놓고 있어서,  소리들의 혼재로 길거리에서 구역질이  정도로 어지러웠던 경험을  적이 있다. 최근에는 외부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놓는 매장이 많이 줄어든 편이긴 하지만, 여전히 일반 음식점 상권이 발달한 곳에서는 여전한 현상이다.

현기증나는 길거리 바로 옆으로 난 도로에서는 그 어느 나라보다 클랙슨 소리가 많이 들린다. 1초의 액셀의 머뭇거림도 허용하지 않는 나라. 그리고 빠른 배달을 위해 수만 대의 오토바이들이 도로와 거리를 넘나들며 소음을 일으키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나라, 그곳이 바로 한국이다.     


사는 집 공간마저 시끄럽다. 건축사와 시공사들의 농간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매너없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하지 못하는 입주민들의 문제인지 아파트와 빌라 사이의 층간 소음 문제는 끊이지 않는다(최소한 휴대폰 진동 소리가 너무 쉽게 윗층에서 들린다는 점은 건축 자체의 문제인 것은 아닌가 싶다). 밤 11시쯤 불을 끄고 조용히 침대에 누워있으면, 윗층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 무엇인지 유출해볼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이건 단순히 내가 예민해서가 아니라, 시공의 문제이거나 매너의 문제일 것이다.


시각에서의 문제를 다룬 지난번 글에서 언급한 각종 디스플레이와 사이니지의 범람도 소음의 문제에서 한몫 한다. 디스플레이들은 발광으로 눈을 어지럽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터져나오는 광고 소리로 귀도 아프게 만든다. 모두 내 물건을 사라고 아우성이다. 물건, 음식, 집, 자동차, 금융 상품처럼 실체가 있는 것부터, 이미지, 정치적 메시지, 고도화된 브랜딩, 그리고 나에 대한 관심을 구매함으로써 내 인기를 더 높여달라는 연예인들의 아우성들로 가득하다. 대한민국의 '종특'인 로고송과 함께 터져나오는 메시지들은 도저히 거리에서 사색할 수 있는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소리는 시각적 효과 만큼이나 강렬한 인상과 기억들을 남긴다. 그렇기에 앞서 언급한 소음의 경험들은 강렬한 짜증스러움과 고통의 경험들을 뇌 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 예상되는 소음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할 때 우리는 벌써부터 긴장하고 빠르게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진다. 소음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현장에서 가장 큰 주의를 끌고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직접적이고 강렬한 효과를 가져온다.



2. '배경'음악


또한 음악 그 자체는 어느새 무언가 다른 활동을 할 때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배경적인 소음으로 전락해버렸다. 일하면서, 놀면서, 어딘가로 이동을 하면서, 어색한 정적을 물리치기 위해 음악이 사용되고 있다. 음악의 흐름을 성설히 귀로 좇으면서 구성과 화성, 가사와 음색을 음미하는 감상의 깊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학에서 교양음악 수업을 들을 때 교수는, 자신은 음악을 감상한다는 것은 오롯이 음악 자체만을 집중하여 들으면서 곡의 전개와 화성, 전형성과 변칙성을 살피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전형성이라는 것은 해당 음악이 만들어진 시기에 미루어 당시의 '매너'(양식)에 맞춰서 전개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를테면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곡을 듣게 된다면, 악장이 3악장 형식으로 되어 있고 두 번째 악장이 '안단테'로 되어 있는 클래식 시대(고전주의 음악 시대)의 전형적인 구성으로 되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반면 변칙성은 당시대의 양식에 있어서 일종의 패러다임적 변화로 볼 수 있는 음악적 특성들을 찾는 것이다. 전형적인 교향곡들이라면 2악장이 느린 곡이 되어야 할텐데,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9번)의 2악장은 '스케르초'의 빠른 악장으로 구성되고 3악장은 느린 악장으로 전개된다. 마지막 4악장은 기악 교향곡의 전형성을 초월하여 합창단이 중심이 되어 성악이 연주되는 매우 긴 악장으로 구성된다.

교수는 덧붙이기를, 자신은 좋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했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훌륭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식사를 하는 모습은 아주 어울릴 법한 모습일텐데, 교수는 최소한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그 음악의 구성을 파악하는 데, 동기음이 어떻게 나중에 변용되는지 살피는 데, 음 소절 하나하나의 전개를 따라가는 데 정신이 없어 도저히 식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이나 음악에 편집증적인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하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음에 예민하고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수의 얘기는 음악 자체가 주는 강렬한 효과와 특성들에 저절로 이끌려 다른 일을 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는 동시에 음악 자체가 어떤 활동들의 배경이 되지 않고 '감상과 분석'의 행위가 주를 이루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각예술 분야에 있어서는, 이와 비슷한 사례로 마크 로스코의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뉴욕의 근사한 레스토랑에 자신의 작품을 디스플레이하는 것을 전제로 작품 의뢰를 받았지만 로스코는 거절했다. 작품이 어떤 행위들의 배경이 되는 행태를 예술가적 자존심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작품의 내재적 가치는 최대한 다른 주변적인 배경의 영향이 없는 상황에서 진지하게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예술 지론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이와 차이가 크다.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훨씬 배경적인 기능으로써 활용되는 경우가 잦다. 크고작은 작업장에서 음악은 단순반복적인 일들에서 오는 지루함을 해소하기 위해 빠른 박자와 흥겨운 리듬의 가벼운 댄스곡이나 트로트곡을 크게 틀어놓는다. 맥 노트북 유저와 "카공족"들의 성지인 어느 카페에서는 '백색소음'으로서 적당한 무드와 템포의 재즈곡들이 계속 흘러나온다. 곳곳의 건물들에서 음악은 배경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데 쓰인다. 음악 자체에만 주목해서 듣는 행위는, 왠지 모르게 지루하고 비효율적인 것처럼 느낀다.


음악은 차를 타고 먼 곳으로 이동할 때의 외로움을 달래고 어떤 기억을 떠올리며 사색을 하고 싶을 때, 그리고 카페에서 좋은 친구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중 약간의 공백 가운데 감미롭게 맛볼 수 있는 일종의 풍미를 조는 등, 배경적인 역할에서도 훌륭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좋은 소리, 좋은 음악에만 집중해서 진지한 감상을 하는 습관을 갖는 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정신과 감정에 스며들지 못하고 주변에 흩어져만 있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소리들이 많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주방의 작은 창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작은 새소리, 정교하고 이성적인 논리적인 구조의 고안으로 완성된 바흐의 변주곡, 어떤 특정 기억들을 상기시키는 음악/소리에 대한 사색은, 우리 주변을 맴돌다가 각자의 순간들에 스며들지 못하고 흩어지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값진 소리,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와 관련 있는 것들이다.    



3. 기억을 담는 소리들


우리는 특정 기억들을 특정 음악과 소리에 연동하여 담아낸다. 이것은 후각이 하는 역할과 비슷한데(아카시아꽃 냄새를 맡으면서 떠올리는 어떤 풍경들, 좋아하는 음식의 냄새에서 떠올리는 어떤 기분좋은 상황에 대한 기억들), 보다 더 구체적인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기에 생생한 경험으로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 음악의 멜로디와 리듬은 반복해서 익히게 되면 쉽게 잊어버리지 않게 머릿속에 각인되는 특징이 있다. 특히 대중음악은 가사와 따라부르기 쉬운 '리프'(멜로디와 리듬 패턴)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 번 분명하게 각인되면 좀처러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 패턴을 익히고 있는 사이 음악적 즐거움을 충분히 느끼며 즐기듯이 음악을 내면화한다. 동시에 당시 그 음악을 들을 때의 상태(감정과 경험의 형태)에 따라 음악의 자기 내면화의 농도가 달라진다. 기쁨, 환희, 슬픔, 우울, 고독, 고양, 침잠 등의 감정의 상태에 따라 그 음악을 내면화하여 받아들이는 정도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이는 곧 단순히 어떤 음악이 객관적으로(형태학적으로 음율의 신선함과 리듬의 정확성, 멜로디의 아름다움의 객관적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했을 때) 더 뛰어난 곡이라고 해서 그 음악을 모두가 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떤 상황에 어울리는 서로다른 음악에 빠져들게 되고 제각기 다른 음악에서 파토스(pathos)를 체험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전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지만, 나는 Norah Jones의 <Lonestar>라는 노래를 들으면 보병학교에서 받았던 2주차 유격훈련의 복귀행군이 저절로 떠오른다. 바로 쉬는 시간에 이 노래를 잠시 들으면서 그 평온함과 화음의 아름다움에 힘을 얻어 어떻게든 희망적인 마음을 가져 복귀행군을 마무리지었던 그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나는 장교로 입대했기에, 당시에 MP3플레이어 정도는 어느정도 소지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훈련 중에 들으면 분명한 문제가 되겠지만).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리며 이 노래를 들으면, 조금의 과장을 덧붙여서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힌다.


어떤 노래들은 경험하지 않았지만, 여러 주변적이고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거나 동경하는 어떤 순간,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효과도 가져온다. 마치 우리 뇌의 무의식적 작용이 만들어내는 꿈의 세계처럼, 특정 노래들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한 사건에서 같이 들은 노래가 아니더라도 어떤 비슷한 유형의 감정과 이미지들을 만들어내어 그 순간을 즐기게 한다.

나는 Weezer의 <Butterfly>를 들을 때마다, 어린 시절 봄날의 들판에서의 경험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내가 그 당시에 체험하지 않은 노래인데도, 마치 그때 이 노래를 들으며 잠자리채를 들고 밖으로 나가 나른한 일요일 오후 가엾은 나비를 쫓고 있는 듯한 어린 시절의 모습을 실제처럼 느끼고 상상하게끔 된다(가사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상상의 부분이다). 노래 가사 속의 회한과 후회, 반추하는 듯한 그 독백이, 나의 덧없는 일상 속에서 잊혀지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의 소중한 감성과 향수 따위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선 어느 땅바닥을 기어서 열심히 놀던 그 모습이, 교회 찬송가 소리, 아이들의 재잘거림, 눈부신 햇살로 눈을 비비던 내 모습 같은 것들이 연이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노래와 음악, 어떤 소리들은 우리의 삶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고 끝까지 이어질 것이다. 하나하나의 좋은 소리/음악들은 우리에게 잊힐 수 없는 기억들을 심어주고, 죽음의 순간까지 같이 할 것이다. 오월의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도, 이른 아침의 새소리도, 바닷가에서 공포를 느낀 파도소리 등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소리들과 함께 하며 생각한 것들, 경험한 것들은 남은 나의 삶에도 영향을 줄 것이고 나의 마지막까지도 여러 공감각적 심상을 같이 덩달아 가져오며 아름답고 오묘한 기억들을 머리와 가슴에 켜켜이 새겨놓을 것이다.  


죽기 전에는 어떤 노래를 들으면 좋을까. 나의 삶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그런 노래가 귓가에 들려오는 가운데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과거를 회상하며 눈을 감을 수 있는 노래. 여러 가지 추억들과 회한, 복잡한 감정들이 서로 어우러져 한 차례 마음을 훑고 지나간 후, 그래도 내 삶을 이제는 인정하고 놓아주어야 할 그때에, 변사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정도 나의 죽음을 정리할 수 있는 그런 음율이 귓가에 들려오면서(그렇게 상상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어떨까. 소리와 음악이 시간의 지배 속에서 그 흐름 속에서 과거-현재-미래를 순차적으로 지나가버리듯, 우리네 삶도 그러한 흐름에 맞춰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순간들을 인지하고 과거의 삶을 내보낸 채 담담히 러닝타임의 끝을 맞이하듯 죽음을 기다리고 맞이할 수 있다면.


소리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경험의 풍성함의 정도와 삶의 의미에의 고민의 정도를 더하겠다는 의지의 표상이기도 하다. 온갖 쓰레기같은 시각 이미지와 소음들로 둘러싸인 이러한 세상에서, 감미로운 소리/음악을 찾고 그때의 경험의 의미를 찾겠다는 것은 단순한 음악 감상의 취미에서 하는 행동 그 이상의 의지이자 결단이다. 주의를 기울여 어떤 소리를 탐미하는 사람은 '시간'과 '순간'에 대한 특별한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다. 직관적인 시각적 이미지가 주는 편리함에서 벗어나, 소리/음악은 일정한 흐름 속에서 다른 전개를 예측하거나 기다려야 하고, 그 음율과 리듬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연동시켜 특별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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