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는 것의 반향
몸에 무언가 닿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느낌을 자아낸다. 기분 좋거나, 불쾌하거나.
서울 같은 인구밀도가 지나치게 높은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과의 접촉이 불가피한 경우가 많다.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과 쇼핑몰 같은 대중이 많이 모인 곳에서 사람들끼리 어깨를 부딪히거나 옷깃이 스치는 경우는 종종 발생한다. 이런 식의 접촉은 불쾌한 경우에 해당한다. 최대한 서로 부딪히지 않고자 서로 신경을 쓰며 움직이며, 그렇기에 '스몸비'들이나 도로에서 매너 없는 운전을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정당한'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이다. 자기들만의 영역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원활한 활동을 방해하게 된다. 그리고 불쾌한 접촉을 발생하게 된다.
촉각, 그 중 사람간의 접촉에서 느끼는 감각은 그 발생의 시점에서 굉장한 정서적 반향을 일으킨다. 원치 않은 접촉이 강제되었을 경우에는 굉장한 불쾌감을 느낀다. 낯선 사람의 터치를 반겨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길거리에서의 비의도적인 접촉이 아니라, 어떤 개인적인 욕구 충족이나 의도적으로 불쾌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시도하는 접촉은 모두 형사처별의 대상이다.
훈육적인 차원에서라도 교육자가 집행하는 체벌은 어떠한 형태여도 유익하지 않게 느껴진다(최소한 당사자에게서는). 모두가 경험했다시피, 우리는 학교에서의 체벌로 특별한 교화가 되거나 더 착한 아이가 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되는' 과정이 그런 체벌이라는 폭력적 접촉으로 될 리 만무하다.
지루하고 피로에 허덕이는 회사 내에서는, 아무리 친근한 상사나 직장동료가 사기를 북돋는 차원에서 하는 가벼운 터치라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무언가 지시를 내리기 위해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해서 머리 위에서 조잘거리는 얘기 또한 불쾌하기 그지없다. 개인적인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직간접적인 접촉은 모두 불쾌한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 간의 접촉이 주는 불쾌함으로 인해 일정한 '거리두기'란 서로 지켜야 할 예의이다. 신체적인 접촉은 감정의 영역으로 불쑥 들어와 직접적이고 강렬한 정서적 반향을 일으킨다.
기분좋은 기억을 남기는 접촉들은 무엇이 있을까. 대도시에서의 일상에서는 쉽사리 얻을 수 없는 경험이기에 과연 그런 접촉이 있기나 한 것인가 애써 생각해내보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공공장소에서의 부정적인 기억들은 잠시 밀어내고 우리의 가정에서,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경험하는 접촉들을 떠올려보면 기분 좋은 감정을 자아내는 접촉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인 혹은 부부끼리 손을 잡고 산책하는 모습은 언제나 싱그럽고 가슴 떨리는 감정을 자아낸다. 그 부부 혹은 연인이 얼마나 나이가 젊은지 여부를 떠나서 그 관계적 맥락에서 느껴지는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 때문이다.
친구들 사이의 접촉은 내가 세상에서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경쟁적인 오락과 경기를 마치고 하는 경쾌한 '하이파이브'나 막역함을 과시하는 어깨동무는 나의 세계에서의 소속감과 나의 위치를 확인하게 해준다. 청소년기 아직 미약한 자아의 상태로 인한 우울감과 슬픈 감정에 휘말려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곁에서 위로해주는 친구의 어깨 두드림과 포옹은 극단적인 감정의 바닥으로 치닫지 않도록 도와주는 큰 역할을 한다.
부모의 접촉에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 절대적인 헌신과 사랑이 녹아들어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도 부모의 접촉들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예쁘다고 다독이는 손길, 다른 길로 새지 않도록 손을 꽉 붙잡을 때 느끼는 악력, 배가 아플 때 어루만져주던 손바닥의 감촉과 온도가 기억난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아버지는 내가 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놀다가 잠들어 있을 때 나를 안아 들어서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잠결에 공중에 떠올라 방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을 느낄 때, 가장 편안한 감정을 느꼈다. 평소에 결코 다정하거나 섬세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내가 의식하지 못할 것 같은 때에 조심히 안아서 옆방으로 이동하고 있었을 모습을 생각하면 조금은 뭉클한 기분이다.
어떤 기억들을 환기시키는 촉각적 경험들이 있다. 다시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기억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들은 대부분 몸과 관련된 경험에서 비롯된다. 자전거를 처음 배웠을 때 골목길에서 넘어져 무릎을 다치고 큰 아픔을 느꼈을 때(처음으로 하늘이 노래지는 경험을 했다),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앉았던 나무 의자의 차갑고 딱딱한 질감, 추운 겨울 동네 친구들과 딱지치기를 신나게 하고 들어오던 길에 느꼈던 덥고(너무 열심히 활동해서) 추운(바깥 공기의 한기로 인한) 느낌이 만들어내는 묘한 생동감, 여러 생소한 악기들을 처음 손으로 집고 입으로 불어볼 때의 신기함, 익숙치 않은 의류나 액세서리를 착용했을 때의 감촉들 중 영원히 기억 속에 남는 것들이 많다.
사물들에서 느끼는 촉각은 특정 기억들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떤 순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무의식 중에 남아 있는, 좋은 감촉들이 자아내는 좋은 기억들이 있다. 샤워할 때의 상쾌함, 책장을 넘길 때의 기분좋은 까슬함, 아침을 맞이할 때 얼굴로 받아내는 햇빛의 따스함과 푹신한 침대와 이불이 전달해주는 부드러움, 키보드, 악기, 연필, 각종 작업도구들을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쥐고 터치해서 만들어내는 그 익숙하고 몸에 배여있는 그 반가운 감촉들.
또한 몸은 어떤 감촉들(특히나 통증 같은 아픔의 감각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서, 이후에 비슷한 경험이 반복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일종의 전조 현상처럼 방어적인 반사작용을 일으킨다. 뇌에서 특정 판단을 해서 좋고 싫음을 가늠하기 전에 몸이 먼저 알아서 반응하는 것이다. 얼마나 동물적이고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감각인 것인가.
자연의 감촉은 어떠할까. 새로운 환경이나 현저한 계절감 속에서 느끼는 감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접촉이 주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바람의 세기와 느낌은 계절마다 다르다. 똑같이 흐르는 물에서도 감촉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 여름의 싱그러운 나뭇잎을 만져보면 봄의 새순에서의 보드라운 느낌이 푸릇하고 건강한 잎으로 성장했음을 새삼 느낀다. 가을의 단풍과 낙엽은 시각적/미학적으로는 매우 다채롭고 풍성한 느낌을 자아내지만 손으로 만졌을 때에는 바스락거리고 물기가 빠진 노쇠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음을, 이제 곧 혹독한 겨울이 와서 이 모든 것이 생기를 잃을 것임을 생각하게끔 한다.
나는 많이 걷는 편이다. 많이 걷고,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10대 때부터 스트레스를 받거나 어떤 특정한 생각에 빠지고 싶을 때면 정처없이 걷는 편이었다. 30대에 들어서자 서서히 무릎에서의 가벼운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더니만, 이제 30대 끝 무렵에 들어서자 아주 오래 걸으면 무릎과 발목이 무척 아픈 것을 느낀다. 같은 땅과 같은 장소를 여전히 걸어다니지만, 내 몸과 땅의 접촉으로 느끼는 통증의 감각을 통해 시간의 변화와 몸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감각 기관 중 접촉을 통한 경험만큼 시간과 몸의 변화를 정확하고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경험이 없다. 더욱 빠르고 직접적으로 몸이 노쇠해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린다.
시각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점점 감촉이 주는 자극들을 외면하고 즉흥적이고 자극적이며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연속만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상호작용보다는 일방적인 메시지가, 맥락보다는 순간의 사건이 더욱 중요한 것이 된다. 반면에 촉각은 특별히 어떤 상황적 맥락과 주변적인 관계 속에서 그 감각의 본연의 느낌과 의미를 찾고 기억에 남기는 경우가 많다. 촉각적 경험은 일정한 흐름과 반복 속에서 그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사람은 동일한 자극에서도 그 자극을 준 주체가 누구/무엇인지, 그리고 의도된 상황인지 아닌지에 따라 서로 다른 기분을 갖는다. 그리고 그 강도의 스펙트럼도 상황과 정도에 따라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아주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극한의 고통까지도 촉각적 경험은 포괄한다. 촉각적 경험들에 무심해진다는 것은, 나의 세계를 지나칠 정도로 보여지고 보는 것에만 신경쓰게 되는 행동에 따른 반대급부적 현상이며, 이것은 섬세한 촉각적 경험을 점점 잃어버리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몸은 이러한 촉각적 반응에 크게 동요하거나 극적인 반향을 경험하는데, 그렇기에 더욱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촉각적 경험을 맞이하려 한다. 시각 경험처럼 어떤 논리적인 흐름대로 사건의 인과관계와 객관적인 정보를 빠르게 확보하기 위한 정보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만약 촉각이 즉각적인 반응이 필요한 경우라면, 그것은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기 전에 피하거나 감전 같이 몸이 큰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피할 때처럼 보호작용을 발동할 때인 것이다. 그 외의 경험에서는 촉각은 시간과 상황의 변화, 대상의 서로다름, 당시의 기분에 따라 다른 감정과 기억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청각적 경험은 일정한 소리의 연속과 흐름을 충분히 감지한 이후에야 지난 기억들과 감정들의 반향을 일으킨다. 시간적 지배를 받는 청각적 요소는 특정 동기가 되는 주제음이나 패턴, 리듬감을 어떤 사람이 충분히 인지할 만큼의 힌트로 제공되어야 그 존재를 정확히 파악하고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상태가 갖춰진다. 더더욱 복잡하고 체계화된 소리의 연속인 음악의 경우, 시간의 흐름대로 자리를 지켜 집중하여 듣고 있어야만 온전히 그것의 감각적 체험을 만끽할 수 있다.
촉각적 경험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한순간에 우리에게 와닿고 감정의 파장을 일으킨다. 몸이 불러일으키는 촉각적 경험의 기억은 한순간이어서 뇌의 판단의 프로세스를 초월한다. 그것은 한순간에 과거 어린 시절로, 기분좋은 한 때로, 극심한 고통의 순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 강렬함이 너무나 생생해서, 때때로 우리는 어떤 촉각적 경험을 상시키실 때 몸서리를 치거나, 설렘으로 다시금 경험하고픈 마음에 애타게 된다.
아이가 태어났다.
부모가 되어 아이의 얼굴과 손가락, 발가락을 만져본다. 그 연약하고 부드러운 촉감. 무심결에 아이가 움직이면서 그 작고 연약한 손가락이 내 손가락에 닿았을 때의 그 느낌. 그 생소하면서도, 어렸을 적에 부모를 통해 무의식 중에 내 몸의 기억 한편에 남아 있을 그 감각의 발견에,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한다. 과거의 세밀한 촉각적 경험들이 한순간 이곳으로 회상되어 경험되어진다.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해, 내가 지금 누구와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가장 확실하고 절절하고 틀림없는 감각과 조우한다. 데카르트적 표현으로 변용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닿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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