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생각한 노인의 모습은, 그들의 신체적 늙음과 함께 기억과 생각, 감정을 느끼는 정도도 점점 퇴화하는 존재이다. 아무리 즐거운 일을 경험하고 화려한 광경을 보게 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감각기관들도 퇴보하기에 훨씬 덜 흥미롭게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죽음을 기다리는 시기에도 슬픔과 두려움을 덜 느끼고 젊은이보다 훨씬 그 시기를 잘 감내할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막연한 그 사고 속에는 마치 노인을 거의 '산송장'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내포돼 있었다. 그 충혈되고 흐릿해진 눈빛 속에서, 마치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 또한 뿌옇고 어두운 세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10대의 나는 노인의 생각과 감정을 감히 상상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다른 차원의 존재이다. 지금의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노인이 되어서야 생각할 만한 주제가 될 법한 죽음은 생각보다 금방 중요한 사유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죽음은 추상적이고 다른 이야기 속의 내가 막연한 미래에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 정도의 이야기로 상상될 뿐이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면서 그 막연한 미래는 생생한 현실로 '현장화' 되어간다. 가까웠던 사람들 중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생겨나며 그들을 떠나보내며 추도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횟수가 점점 많아진다. 타인의 죽음의 경험과 그 의미, 느낌들이 생생히 와닿는다.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깨닿는다.
20대와 30대의 시기를 지나면서 겪은 당혹감은, 신체의 노화만큼 마음과 감정이 그렇게 빨리 늙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체는 나날이 늙어간다. 20대 때에는 어디 몸 한 군데 불편한 부분이 생기면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가도 큰 문제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원상태로 복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30대부터 달라진다. 어딘가 아픈 곳이 생기면 이제 다시는 원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는 부분들도 있다. 영구적인 손상,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노화라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눈, 목, 무릎 같은 부위들은 나날이 상태가 안 좋아지고 다시는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 안다. 비문증이 지금보다도 더 심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지금보다 나아질리는 없다는 사실에 공포와 좌절감이 엄습한다. 그래도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그러나 일말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완전히 저버리지는 않으려 애쓴다). 20대 중반 장거리 행군과 각종 훈련으로 안 좋아진 양 무릎과 오른쪽 어깨는, 이제 더 불편하고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겠다는 느낌이다. 크게 무리하지 않고 운동을 꾸준히 하면 회복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현재의 내 기준으로는 결코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불편함이 현저해질 것으로 느낀다.
신체는 늙으나 감정은 늙지 않는다는 점이 인생의 비극이다.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 죽기 힘들어진다. 어린 시절의 죽음은 추상적인 것이어서 직접 경험할 사건으로 와닿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죽음은 관념적인 상태에 머물 뿐이다. 나이가 들면서는 간접경험되는 죽음에 대해 점점 현실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정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 의미와 결과를 알게 되면서 너무나 죽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신체와 함께 감정도 노화되어야 상대적으로 쉽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신체와 같은 식의 기능적 퇴화를 심하게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력, 사고력, 판단력이 흐려지는 차원과는 다른 문제이다. 그러한 지적 능력은 신체의 노화와 함께 세포의 죽음과 뇌 기능의 저하와 함께 분명한 퇴보의 길을 걷게 되는 대상이다. 그런데 감정의 영역은 다른 것 같다. 이것은 오히려 생물체의 본능의 영역, 가장 말초적인 신경의 기능과 더 가까운 영역인 것으로 보인다. 삶 속에서 특별히 어떤 즐겁거나 행복한 일,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통해 경험한 그 감정들은 어떤 고유하고 영구적인 흔적처럼 몸의 어느 부분에 각인되어 있다. 좀처럼 없어지지 않은 그 기억과 감정들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거의 그 당시와 동일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의 기억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다. 길을 가다가도 문득 어린 시절 즐겼던 놀이가 떠오를 때가 있다. 대학생 때 여러 사람이 어울러 밤새 놀았던 기억들은 떠올리면 여전히 흥분되고 그 자리로 되돌아가고 싶어진다. 어떤 특별한 정황이 무척 낭만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20대 때 느꼈던 그 감정은, 마흔을 앞둔 지금 이 시점에서 동일한 상황과 마주한다면 어김없이 다시 기억의 수면 위로 부상해 동일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50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끼는 그 도구적 대상(의식주, 취미, 일, 인간관계 등)의 내용과 유형이 얼마간 바뀔지라도, 그 즐거움을 느끼는 메카니즘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들리는 곳이 이제 오락실이 아니라 카지노나 야구장 같은 곳이 되었을 뿐이다. 경쟁을 통해서 이기고 쾌감을 느끼는 것은 동일하다. 사람간의 관계도 어린 시절보다 훨씬 복잡하고 더 정치적으로 변했을 뿐이다. 결국에는 사람을 통해 무언가 토로하고, 위로를 받고, 누군가를 비난하고, 헤어졌다가 다시 합쳐지고, 거리를 두었다가 다시 이해관계에 의해 연락을 하게 되는 것은 예전이나 앞으로나 동일할 것이다. 특별히 고안한 리추얼, 상당히 구별된 삶을 위한 구도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네 삶이란 외형적인 고도화는 얼마간 있을지언정 그 본질과 거기서 느끼는 즐거움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싶다.
그렇기에 점점 죽기는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70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청년의 때에는 분명 이 점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중년에 접어드는 시점에서는 보다 확신있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감정은 10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그리고 죽기 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신체의 계속되는 노화와 거의 여전한 감정 간의 간격이 점점 커짐으로써 더 큰 괴로움이 예상된다. 4월의 벚꽃이 내는 봄내음과 그 낭만적인 감정, 10월의 단풍과 그 쓸쓸한 감정은 그대로인데, 나는 노인이 되면 의지대로 자유롭게 걸어다니며 세상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요양원에서 그저 예전의 그 경험과 감정만 떠올리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지난 반년 간, 엄청난 육아의 과정과 과정들, 그리고 이직과 큰 일들을 몇 차례 보내고 어렵게 글을 쓰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새 아이는 몸을 겨우 뒤집는 수준에서 올림픽공원 잔디밭을 아장아장 걸을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아빠와 엄마를 연신 찾으며 원하는 것을 충족하려고 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까꿍놀이를 하고 부모가 말하는 단어 대부분을 비슷하게 흉내내려고 할 정도로 컸다. 글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핑계일 것이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신생아 시기 때가 더 힘들었다.
쉽게 주변 사람들에게 토로할 수 없는 어떤 울적한 마음이 가득했다. 비문증도 부쩍 더 심해지고, 이직 후 새로운 환경에서 더더욱 불투명하게 느껴지는 미래에의 불안감 탓도 있다.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글을 쓰게끔 자리에 앉지 못하게 했다. 어떻게든 몰스킨에는 중요한 기록들을 남기려고 일말의 노력은 다했다. 그게 최선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식을 남겼다는 사실에 미련 없이 앞으로의 의무를 다하면서 쉽게 삶을 마무리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매우 이율배반적으로 바로 그 아이 때문에 더욱 더 죽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느낀다. 설명할 수 없는 괴로움이다. 매일 커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나는 그 이면의 죽음과 이별을 떠올린다. 곧 이 행복한 순간들과 결별한다는 생각이, 결국에는 시간의 흐름이 이 순간들을 영원히 깊은 심연 속으로 묻히게 한다는 사실에 분노와 슬픔이 엄습한다. 올림픽공원 잔디밭을 걷는 아이의 걸음걸이와 얼굴에 내 삶의 모든 의미가 반영되어 버리면서, 반대급부로 그것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이 끝이 난다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미련한 사고의 회로가 재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이 아이러니를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이가 들어서 얻은 아이이기에, 앞으로 내가 수행해야 할 의무의 난이도도 더욱 클 것이다. 더 오래 일해야 할 것이고, 더 힘들게 하루하루를 아이를 돌봐야 할 것이다. 무척이나 버겁다.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 행복의 감정과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메카니즘을 이제 너무나 분명히 알고 경험하고 있는데, 나의 신체는 남들보다 더 빠르게 늙어가고 의지대로 움직이며 내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되는 시기가 빨리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매우 두려워졌다.
늙지 않는 마음(그리고 늙어가는 신체)이 무엇인지 깨닫고 고통을 느끼고 있는 시기이다. 불혹을 제대로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