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는 겨울이 실제 온도 자체가 유난히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늘상 옛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모되기도 하고 회상하는 시점에서의 상태에 따라 왜곡되기도 하는 것이긴 하다. 그런데 분명 예전에는 수업시간에 배운 '삼한사온'이라는 한반도 지역의 기후 특성처럼 추운 날이 끊임없이 오고가고 영하권 기온이 굉장히 오래 지속됨에 따라 한강이 자주 얼어붙은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연말에는 항상 성탄절 즈음에 눈도 많이 오고 날씨가 많이 추웠다. 그 추위가 이듬해 설날까지 이어졌다. 설날 시골집에 내려가면, 그 근처 호수가 꽁꽁 얼어 있었다. 사촌들과 (지금 생각하면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인데) 그 위로 올라가 썰매놀이나 스케이팅 하는 놀이를 했던 기억이 있다. 고여 있는 물은 항상 얼어 붙었고, 주변에는 녹지 않고 잔존한 흰 눈이 덮여 있는 겨울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환경론자들이나 과학자들이 레퍼토리처럼 경고하고 언론이 전 세계 이상기후 관련한 소식을 보도로 내면서 하는 말처럼, 이제 겨울에도 이상고온으로 인해 기본적으로는 덜 추운 겨울이, 그리고 가끔씩 엄청난 추위가 별안간 덜컥 찾아오는 그런 기후가 되어버린 듯싶다. 대부분의 날은 춥지 않고, 며칠 동안은 '겨울다운' 날씨가 잠깐 지나쳐 간다. 세계적으로도 올해에는 유난히 따뜻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유럽에서는 스위스 알프스 눈이 녹아 푸른 초목이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더 추운 북유럽쪽에서도 따뜻한 날씨가 이어져서 겨울 특수를 누리던 산업들에 피해가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의 경우 유럽의 이상고온으로 주요 수출품인 가스를 자원무기화 하는 전략이 먹혀들지 않아 곤혹스러워한다는 뉴스도 보인다. 난방비가 예상보다 적게 든다는 것이다(오히려 한국이 난방비로 전국이 시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상기후는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한다. 곳곳에서는 전쟁과 핵위협의 소식이 들려오고, 어느 한 곳도 경제가 나아지고 있다는 현황과 긍정적 전망을 내놓는 곳이 없이 죽는 소리로 신음하고 있다. 이러한 인재적 상황 속에서, 마치 자연마저도 인류를 내칠려고 하는 것인지 이곳저곳 고장났다는 신호를 연신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인류 존재 자체가 재앙이다." 자연이 그렇게 진단하고 벌을 주고 있다는 식의 논리가 나온다. 인과관계상 인류가 저지른 해악이, 특히나 최근 약 1세기간 고도화되고 집중화된 과잉적 활동들이 이런 기후변화를 초래한 것이겠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징조를 인류의 욕심과 이기적인 태도에 대한 일종의 (인격화된)자연의 징벌로서 이러한 현상을 해석하고픈 마음을 갖곤 한다.
아무튼간에 요지는, 겨울이 겨울 같지 않아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겨울은 겨울이다. 겨울은 춥고 길다. 특히나 어둠이 길어서 더욱 길게 느껴졌다. 겨울이 여름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낮의 길이이다. 어둠이 더 빨리 찾아오기에 하루가 더 짧게 느껴진다. 겨울의 퇴근길은 여름의 퇴근길보다 더 씁쓸하다. 밤이 충분히 깊어진 것마냥 거리는 어두컴컴하고 오피스 빌딩 사이로 몰아치는 바람은 차디차다. 왠지 하루가 더 아쉽게 느껴진다.
두꺼운 외투와 겹겹이 껴입은 옷은 실내에서 무척 답답하다. 몰 같은 상업시설이나 난방이 잘 되어 건조한 오피스 공간 같은 곳에서는 옷을 입었다 벗었다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짐과 옷의 무게로 항상 힘들다(이건 나와 같은 뚜벅이들에게 특히 더 해당되는 일이다. 자가용으로만 움직이는 사람들은 잘 못 느끼곤 한다). 요즘은 아기 짐과 유아차를 같이 가지고 다녀야 하는 이유로 더더욱 힘이 든다. 가끔씩은 유아차가 부부의 외투랑 각종 짐들을 싣는 수레(?)가 돼 버리곤 한다. 아기는 부모에게 매달려 좀처럼 내려오려 하지 않는다. 팔이 무척 아프다.
가만 생각해보면, 겨울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자유롭고 여유로운 사람들의 몫이다. 가난한 사람들, 노약자들에게는 언제나 힘든 계절이며,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들로 가득하다. 더 많은 비용, 더 많은 돌봄이 필요하다. 이 혹독한 계절을 미처 넘기지 못하고 쓸쓸하게 고독사하는 사람들에 관한 뉴스를 왕왕 접하게 된다.
평범한 일반 시민들에게도 겨울은 왠지 모를 불편함과 짜증스러움을 더하는 계절로 다가온다. 한여름의 더위가 불쾌지수를 높이는 것처럼 말이다. 출퇴근길에 찬바람에 노출되면 절로 '더럽게 춥다'라는 식의 가벼운 욕지거리를 쉽게 내뱉는다. 어렸을 적에는 그저 신나고 특유의 낭만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흰눈 가득한 풍경도 일반 직장인들에게는 출퇴근길의 최악의 장애물이자, 그저 불편하고 짜증스러운 대상에 불과하다. 효율적인 이동, 그래서 시간을 아껴 내가 해야 하는 생산적인 활동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면 짜증이 나는 우리 시민들에게, 그저 덥거나 추운 날씨 자체만으로도 방해받고 불편함만 잔뜩 느끼는 상황이 된다.
반면 여유있는 사람들에게는 겨울은 또 다른 낭만, 과시적인 치장이 가능한 매력적인 계절이 된다. 추워서 실내에서 활동해야 하더라도, 이들이 즐길 실내 놀잇거리들은 무척 많다. 명품 플래그십 스토어, 호텔 바와 뷔페, 몰링(malling) 등에서 만끽하는 소비주의적 생활 양식은 겨울에 오히려 더 풍족하게 그들의 삶을 채워주는 것 같다. 야외 활동도 추우면 추운 대로 그 자체를 낭만이자 향유로서 만끽한다. 각종 값비싼 레저를 즐길 수 있고, 정말 날씨가 방해가 된다면 아예 그런 날씨를 피할 수 있는 해외로도 얼마든지 나갈 수 있다. 자연 그대로 주어지는 날씨를 피해서 다낭으로, 니스로 언제든지 나가서 따뜻한 날을 보낼 수 있다는 컨디션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의 마음을 무척이나 여유롭게 만든다. 여유는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으면 생기는 것인데, 그 살 수 있는 것 중에는 계절도 포함되는 것 같다.
2월 입춘을 지나면서, 애타게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심정이 되는 까닭은 단순히 나도 이제 더 나이가 들어서일까. 갈수록 낭만적이었던 상황들이 현실 속에서, 그리고 맥락 속에서 다르게 해석되고 냉정한 '니힐리즘'적 관점에 의해 인식되면서 점점 더 '~이(가) 예전 같지 않다'라는 생각을 많이 갖곤 한다. 추운 겨울도, 많은 비도 점점 더 낭만보다는 측은하고 힘든 것, 자연이 우리에게 원래 주는 객관적 영향력은 물론, 그 이상의 혹독한 의미를 지닌 슬픈 사실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아주 따뜻하고 아름다운 날에서 맞이하는 불행은 그 대비적 효과가 만들어내는 아이러니함이 그 사람이 당면한 비극을 더 부각하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극적 효과일 뿐이다. 희곡에서 흔히 경험하는 카타르시스와 같은 것이다. 진정한 비극은 정말 어려운 환경에서 정말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아픔과 고통이 배가되는, 이중 삼중의 괴로움의 시너지가 발현되는 상황이다.
이상기후로 따뜻해졌다고는 하지만 겨울은 겨울이다. 추운 날씨 속에서 타인들보다 분명한 더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으로, 가난으로. 이들에 대한 마음이 점점 더 쓰이는 나이와 인식 수준에 다다르면서, 그리고 절대적인 보호와 관심을 받아야 하는 여리디여린 아기를 키우게 되면서, 겨울은 점점 더 예사의 평범한 계절이 아닌 것으로 다가온다. 뿌연 겨울 운무가 주는 낭만적 색채가 벗겨지면서 더 황량하고 척박한 겨울의 본래 색채가 드러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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