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정치 그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직업 상 외국인 게스트를 모시고 한국의 이곳저곳을 소개할 일이 많은 편이다. 그날도 지인의 특별 요청으로 한 리투아니아 아티스트와 함께 서울을 투어하던 중, 마침 근처에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더위도 피할 겸 전시를 보기 위해 방문하게 되었다.
아마도 어느 학교에서 현장학습을 나온 모양인지, 곳곳에 작품을 관람하는 중고등학생들을 쉽게 찾아볼 있었다. 활기차게 작품을 즐기는 아이들, 또 수줍지만 먼저 나서서 외국인 게스트에게 인사를 걸어오는 아이들의 모습에 우리 모두 흐뭇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음 작품을 구경하기 위해, 작품 앞 의자에 착석하려던 순간이었다. 게스트가 순식간에 굳은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전시장을 빠져나갔다.
“방금 그 작품, 러시아 작품이에요!”
그제야, 아차 싶었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기도 했다. 국가기관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에서 이런 경우를 마주하게 될 줄이야. 물론 그 작가가 러시아 정부에 반하는 아티스트였을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어디엔가라도 표기를 해주었다면 이런 불쾌감을 선사하지 않았을 텐데, 어찌 되었든 세심하지 못한 큐레이팅였음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국제적 이슈에 대한 한국 예술계와 해외 예술계에서의 입장은 묘하게 평행선을 달려왔다.
가령, 올해 화제가 되었던 칸 영화제의 사례를 살펴보자. 우크라이나 사태가 발발하자마자 칸 영화제 집행부에서는 아래와 같은 서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이 용납할 수 없는 상황에 반대하고, 러시아의 태도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함께 연대의 목소리를 내겠다. 우크라이나 국민이 원하는 조건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러시아 공식 사절단을 환영하지도 않고, 러시아 정부와 연계된 사람의 칸영화제 참석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칸영화제 입장문 전문 링크
국제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화기관으로서 적극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 관련 기관에서는 아직까지 러시아 작품에 대해 어떤 액션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일부 문화행사들만이 개별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지의사를 밝히고 있을 뿐이다.) 이는 글로벌 진출에 대한 우리 문화계의 이중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세계 진출을 통해 명성과 이득을 취하고는 싶으나, 한편으로는 정치적 이슈 등과 같은 세계적인 책임의식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화계가 정치에 아주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세월호 사건 때의 부실 대응을 문제 삼는 영화를 상영했다가 정치적 탄압을 받았고, 어떤 문화인들은 정치적 입장을 밝혔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예술활동에 제한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역시 국내 정치에 머물러있다는 점이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 한국문화에 국제적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는 지금, 역으로 한국 문화계 또한 국제문화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이와 관련된 국제적 민감성을 길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세계로부터 무언가를 확인, 인정을 받으려 만 하는 것이 아닌 국제적 문화의 주체로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하다못해 스파이더맨 영화에도 이런 대사가 나오지 않는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고.
세계의 중심이 되고 싶다면, 제대로 된 국제적 태도부터 갖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