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이웃집에 신이 산다>
아침마다 울려대는 재난문자가 알람을 대신하는 요즘. 만약 재난문자가 아닌 자신의 수명을 알려주는 문자라면 어떨까? 당신이 당장 1분, 1초 뒤에 죽는다고 알려주는 문자라면 말이다.
여기 한없이 하찮고 괴팍한 한 남자가 있다. 아내에게 호통치며, 딸에게 폭행도 서슴지 않는 그. 그런데 그가 바로 우리가 찾던 My GOD, 신이란다. 만물을 관리하는 스트레스로 휩싸인 그에게 유일한 취미란, 인간들 괴롭히기뿐이다. 온갖 자연재해, 인재를 끌어와 인간을 죽이는 모습에 그의 딸 에아는 환멸 한다. 오빠 J.S(우리가 아는 예수 맞다)가 사도 12명을 통해 인간세상을 구하려 했듯, 이제 에아도 아버지가 망친 세상을 구해보고자 한다. 술에 취해 한심하게 늘어져 있는 아버지에게서 서재 키를 훔쳐, 이 세상에 모든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모든 수명을 전송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6 사도를 찾기 위하여 인간세상으로 굴러가 본다.
이 영화에 원제는 Le Tout Nouveau Testament이다. 직역하자면 새로 쓰는, 새로운 신약성서 정도가 되겠다. 원제가 바로 알려주듯, 에아는 자신의 6 사도들과 함께 자신만의 새로운 신약성서를 작성해나간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도를 떠올린다면, 굉장히 성스럽고 희생 가득 한 자들을 떠올리기 말이다. 하지만 에아의 성도들은 자칭 성도착자, 살인자 그리고 성 정체성으로 혼란스러운 소년까지. 우리가 닮고 싶은 삶이라 말하기 힘든 인간상들이다. 심지어 신약성서는 이들을 개화시키는 따위의 내용이 아닌 그저 사도들의 이야기를 담는다니. 본디 성서란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 배웠거늘, 에아의 성서에선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놀랍게도 어찌 보면 근본 없는 복음이 계속될수록, 그것을 보고 듣는 관객들은 무언가 해소되고 깨닫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단순히 관객들의 착각일까?
사실 자신의 죽음의 순간이 다가옴을 깨닫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삶이 변한다는 설정은 그다지 신선한 것은 아니다. 불치병, 시한부는 우리나라 드라마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뭔가 다르다. 사람들이 죽음을 깨닫고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그들이 변하는 순간은 에아를 만났을 때이다. 6 사도 모두 자신의 수명을 알고 마음의 동요가 일지만, 그들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동안 살아왔던 것처럼 자신감, 이상, 사랑 등이 결핍된 채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에아는 그다지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신약성서를 위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내면에 가진 삶(음악)을 넌지시 알려주었을 뿐이다. 에아는 그들이 가진 것을 깨닫게 해 주었을 뿐, 새로운 무엇도 주지 않는다.
우리가 신을 찾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극한 혹은 힘든 순간에서 신을 찾으며, 그가 이를 해결해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가 원하는 신은 무언가를 주는 것이 아닌, 우리 속에 무언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준다. 구원해준 것은 신 따위가 아니다. 이 영화의 신인 에아의 아버지조차 컴퓨터가 없으면 그저 깡패한테 맞고 다니는 괴팍한 생명체일 뿐이니 말이다.
'결핍'이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결핍이란 우리가 미처 찾지 못한, 깨닫지 못한 무언가를 일컫는다고 생각한다. 6명의 사도들이 에아라는 희망을 만나 깨닫게 되었듯, 우리도 우리의 미쳐 꺼내지 못한 결핍을 끄집어내 보자. 물론 그 결핍을 굳이 채우지 못해도 좋다. 그러나 그 결핍이 자신의 삶을 갉아낸다면, 해답은 당신에게 있다. 이것은 운명 같은 것도 아니다. 운명이라면 에아의 어머니가 그러하듯, 그렇게 쉽게 리셋할 수 없을 테니. 그저 결핍이란 초기 세팅일 뿐이며, 자신이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요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