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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머스썸머 Mar 10. 2020

이별의 푸가 / 김진영

이별은 왜 왔을까. 우리는 왜 헤어져야 했을까.

미성년 시절부터 치정멜로극을 좋아하던 저는 커서 애수와 미련이 가득한 사랑/이별 서적을 끔찍이 좋아하는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에대하여(장석주) > 사랑의단상(롤랑바르트) > 이별의푸가(김진영)

읽고 있던 책이 또 다른 책을 이어주는 일. 너무 설레고 만족스러운 경험이라 롤랑바르트의 역자인 김진영님의 이번 책도 사실 꽤 기대한 상태에서 읽었는데 실망이 없었다.


며칠간 출근길 버스에서 읽어버려서 따로 메모는 못해두고, 귀퉁이를 접어두었던 페이지만 옮겨본다.



p.49

때로 나는 나를 껴안는다. 꼭 껴안는다. 너를 껴안듯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누군가의 혈통인 너를 사랑하면서 내가 만든 너를 사랑하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건 그 두 존재를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너는 내가 만든 네가 있어 내게 있고 내가 만든 너는 네가 있어 또한 존재하니까. 사랑의 기쁨은 그 두 존재가 모두 나의 것이라는 기쁨이다.


p. 68

물론 나는 안다. 너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걸. 너의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걸. '....없다는 것', 그 부재를 나는 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이해하라 수도 믿을 수도 없다. 느껴지지도, 붙잡히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 엄연하고 엄중한 사실이건만, 나는 그걸 너무 분명하게 알건만.


p. 94

사랑할 때, 나는 참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보고 싶으면 달려가고 만나고 싶으면 찾아가야 했다. 나는 거절을 참지 못하는 옹고집이었다. 그러나 이별 후에 나는 인내의 미덕을 배운다. 나는 아주 잘 참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새까만 휴대폰이 갑자기 눈 안으로 뛰어드는 순간, 나는 그만 와르르 무너진다. 이별의 주체는 목소리가 둘인 걸까. 연락하고 싶어요! 외치면 또 하나의 내가 마주 외친다. "안 돼, 참아야 해!"라고. 이별의 주체는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보고 싶어요, 다시 만나고 싶어요, 라는 보챔은 실현되지는 못해도 중지되는 건 아니니까.


p.109

부재의 형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부재. 당신이 떠났으므로, 당신이 더는 내 곁에 없으므로 남겨지는 공백이 있다. 마치 내 서가에 있던 한 권의 책을 누군가 가져가면 그 책이 남기는 텅 빈 자리처럼.이 경우 당신의 부재는 다만 '없음'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부재가 있다. 당신을 여전히 욕망하기 떄문에. 당신에게 여전히 애착하기 때문에 나에게 존재하는 부재.


p.142

이제 그 아름다운 당신은, 그 빛나는 순간들의 당신은 당신 것이 아니다. 그 아름다운 당신을 당신은 이미 지나갔으니까. 그 빛나는 당신은, 당신의 순간들은, 모두가 나의 것이다. 지나가면서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들을 다 나에게 주었으니까.


p.153

연애의 시간 안에는 두 개의 시계가 있다. 만남의 시계와 사랑의 시계.

연애의 시스템이 잘 돌아가는 동안에는 만남의 시곗바늘도 탈 없이 잘 흘러간다. 우리는 약속하고, 만나고, 식사하고, 영화 보고, 애무하고, 서로의 육체 위에다 서로의 도장을 찍는다. 사소한 갈등, 약간의 불화, 제법 진지한 다툼들이 물론 있다. 하지만 잠깐씩 멈추면서도 정확한 만남의 시곗바늘은 연애가 무사함을, 잘 지속되고 있음을 늘 가리킨다. 그렇게 만남의 시계는, 연애의 시스템은, 어느 날 이별이 올 때까지, 멈추지 않고 무사하게 잘 지속된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시계가 있다. 그건 사랑의 시계다. 연애의 시스템 안에서 사랑의 시계는 만남의 시계와 잘 구분되지 않는다. 만남의 시계가 잘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그 바늘이 사랑의 시간을 가리키는 거라고 믿기 때문에.

물론 때로 위기 감각이 눈을 뜰 때가 있다. 만남의 시계는 잘 돌아가건만 어쩐지 무언가, 그것도 결정적인 그 무엇이 잘 돌아가지 않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 그럴 때 당신은 나에게 묻는다: 날 사랑하나요? 얼마만큼요? 나는 대답한다: 그럼요, 하늘만큼요, 바다만큼요.. 나는 당신을 꼭 안아주고, 당신은 불안한 나의 포옹 속에서 또 확인한다: 우리는 애인인 거죠? 그럼요, 우리는 사랑하니까요, 서로 죽고 못사니까요, 나는 확인해준다. 그렇게 연애의 시스템은 복원되고 우리는 맏음을 회복한다. 우리는 잘 만나고 있고, 그러니까 탈 없이 사랑하고 있는 거라는 믿음. 만남의 시간이 지속되니까 사랑의 시간도 지속되는 거라는 믿음.

하지만 그럴까? 만남의 시간이 사랑의 시간일까?

*여기서는 '나'와 '당신'을 바꿔 읽어도 좋겠다.


p.157

사랑의 첫 순간은 사랑의 시스템 안에서는 계속될 수 없는지 모른다. 그래서 당신은 '그 사이에' 다른 사랑을 시작했어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고백도 용서도 필요 없는지 모른다. 가슴은 아파도 어쩌겠는가. 사랑의 순간이 그토록 짧은 것을..

그러나 또 하나의 순간이 있다. 길고도 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사랑의 순간이 있다. 그건 만남이 아니라 만남 뒤의 순간, 이별의 순간이다. 부재는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순간이 갇혀 있는 공간이다. 그 공간 안에서 나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p.168

연애의 유치함이 상승하는 유치함이라면 이별의 유치함은 하강하는 유치함이다. 유치해지면서 나는 점점 더 어디론가 하강한다. 오르페우스가 하데스까지 내려가는 것처럼 나는 늪에 빠진 사람처럼 우울과 슬픔과 고독의 땅 밑으로 하강한다. 그 하강의 길은 동시에 세상이 칭찬하는 못든 것을 관통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 길을 관통하면서 나는 그동안 나를 기쁘게 하고 들뜨게 하고 믿음을 갖도록 했던 모든 것들이 포장이고 거품이었음을 알게 된다. 세상이 온통 유치함이고 거품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저 정치의 유치함, 사회의 유치함, 문화의 유치함, 그리고 연애의 유치함들..


p.193

우리가 꿈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건 그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우리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그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사람의 얼굴을 자꾸만 새로운 얼굴로 불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어진 뒤에 돌아와서 다시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려 해도 그토록 다시 보고 싶은 그 얼굴은 붙잡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프루스트는 말한다: "우리가 그 사람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하게 되는 건 사랑이 끝났을 때이다."

그 사람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만 자책하게 된다. 그 사람의 얼굴이 다시 생각나지 않는 건, 내가 그 사람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처음엔 또렷하게 기억이 났었는데 정작 한참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p.201

그리고 이제야 나는 왜 내가 그토록 당신에 대한 집요한 호기심을 버릴 수 없었는지를 이해한다. 나는, 비록 당신은 나를 애인이라고 불러주었지만, 아직 당신의 애인이 되어 있지 못했다. 그렇게 함부로 나는 당신의 애인이 될 수 없었던걸까. 나는 당신의 애인이 되고 싶었다. 당신의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알고 싶고 닮고 싶고 소유하고 싶었다. 나는 결핍을 극복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당신을 집요하고 집요하게 응시하고 만지고 쓰다듬으며 탐색했다. 나는 당신을 다 알지 못했다. 다 소유하지도 못했다. 당신이 나의 애인이었다면, 그렇게 당신이 나의 것이 되었다면, 나의 호기심이 그렇게도 집요했을까.


p.236

그리고 당신은 그 후에도 몇 번 나를 찾아와 말했다. 오늘 자고 가면 안 되나요? 그리고 당신은 얼마나 쉽고 깊게 잠들엇는지.. 그렇게 잠자는 모습은 나를 기쁘면서도 슬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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