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머스썸머 Mar 09. 2020

마음이 뛰면 감고 마음이 멎으면 풀어도 되는 사랑일 때

만 스물 아홉의 끝자락에서

어제, 녀석이 결혼을 했다.


지난 여름 프로포즈를 했다는 소식부터 얼마 전엔 다같이 점심 먹는 자리에서 청첩장도 받았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성으로서의 마음은 식은 지 이미 오래, 남은 것은 '그래 너도 결혼을 하는구나 내 나이가 벌써..' 하는 진부한 하소연 정도.


그래도 녀석은 내게 지난 시간에 대한 의리라도 보여주려는듯 새해의 며칠이 지나 연락을 해왔었다.

[ 썸머, 오랜만에 우리 저녁 먹을까~? 편한 날 아무 때나 알려줘:) ]



6시에 만나자던 녀석은 늘 그랬듯 먼저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춥네, 살이 안 빠지네 따위의 몇 년째 하는 말을 주고 받으며 도착한 근처 식당.

인기 있는 곳이라 자리가 있으려나 조심스레 따라 들어갔는데, 이제 막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와중에도 예약을 해둔 모양인지 직원은 성함을 묻고는 가장 안 쪽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역시 녀석은 '서울 남자'였다.


이미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자리에 앉을 때, 아니 녀석이 내 코트를 받아주던 순간부터 잘 보였는데 녀석은 그 손가락으로 애꿎은 맥주잔만 쥐었다 폈다, 겨우 입을 떼었다.


"썸머야, 들었겠지만 나 결혼하게 됐어."


녀석에 대한 마음이야 진작에 식었고, 당시 내게도 충만한 사랑의 감정이 피어오르던 남자친구가 있었지만(그 사이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막상 과거의 사람에게 현재의 소식을 듣는 순간은 찌릿할 정도로 생경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그림이어서였을까. 듣는 내가 담담하니 녀석도 담담하게 이것저것 얘기했다.

와중에 놀랐던 건, 녀석의 결혼 상대를 소개해준 사람이 언젠가 내게 "둘이 아는 사이었어요? 나는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소개해주려고 했었죠"라던 이 였다는 것.

그리고 녀석이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는 것이 '그 사람의 주변사람들을 알아갈수록 이 사람의 세계가 이렇게 멋진 곳인구나, 나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거다. 녀석이 그런 생각도 할줄 안다는 것이 신기했달까.


한 시간 반 남짓, 녀석과의 (아마도 둘이서는) 마지막이었을 저녁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귓가에 Polonaise가 너무 알싸하게 들렸다. 그리고 녀석을 기준으로 다음 사람과 이전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한 사람은 너무 보고 싶어서, 또 한 사람은 너무 미안해서.

그리고는 볼륨을 마저 키우고, 타고 있던 2호선에서 내려 100번 버스를 탔다.



마음이 뛰면 감고 마음이 멎으면 풀어도 되는 사랑일 때

생각나는 사람이기를

- 당신을 위한 작은 기도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