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관계의 적당한 거리란?
나는 요즘 어린아이로 돌아간 기분이다. 지난 5월부터 엄마와 내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렇게 온전히 딱 붙어있는 시간은 내 기억으로는 아마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인 듯하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부터 최근까지도 계속 일을 하셨는데, 나와는 일하는 요일과 시간이 달라서 아침과 밤에 잠깐씩 얼굴을 보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한평생 일하느라 바쁘게 살던 엄마는 어깨 인대를 다치는 바람에 일을 관두고 수술을 하고 나서야 고단한 삶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일을 그만둔 계기가 아파서라서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그 덕에 우리는 25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서야 다시 온전히 함께 있게 됐다.
사실 우리는 애틋한 모녀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오랜 시간 외로움을 안고 살았고, 성격도 딸같지 않게 무뚝뚝해서 사랑한단 말조차 제대로 한 적 없다. 그러나 멀고 먼 길을 돌아 비로소 모녀의 시간을 보내는 요즘, 함께 있지 못했던 시간만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소중하고, 엄마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느낀다.
나는 다 큰 걸 넘어서 노처녀가 된 지금, 엄마의 살 냄새를 맡고 싶어서 어린아이처럼 옆에 꼭 붙어 있다. 평소 TV를 잘 보지 않지만, 엄마가 TV를 볼 때면 나란히 앉아서 엄마의 똥배를 만지고, 엄마가 낮잠을 주무실 때면 잠도 오지 않으면서 나란히 눕는다.
엄마가 주무실 때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는데, 깊어진 주름을 보면서 그제야 우리 모녀가 많은 세월이 흘러 함께 한다는 걸 실감한다. 엄마의 옆에서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있고 싶지만, 엄마는 25년 전 젊은 모습이 아니고, 나 역시 아무 것도 몰랐던 25년 전의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게 조금 서글프다.
소중함이란 함께 하는 시간과 반비례하는 것 같다. 함께 하는 시간이 적을수록 소중함을 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 만약 엄마가 내가 원하는 언제든 늘 곁에 있었다면, 나는 이 시간을 지금처럼 행복하게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행복은 커녕, 내내 투닥거리면서 지겨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보면 가까운 사이에도 적당한 관계의 거리를 유지하는 건 필요하겠다 싶다. 그 거리라는 건 단순히 지역적인 거리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거리다.
매시간 서로의 삶에 지나치게 관여하거나 붙어있는 건 관계를 대수롭지 않게 만들테고, 너무 먼 건 과거의 나처럼 외로움을 짙게 만드니 딱 중간이 좋겠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중간의 거리에 있을 때에야 소중함을 느끼면서 함께 하는 행복도 느낄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