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 카사블랑카
유난히 축축 늘어지던 장마철이었다. 구르르릉구르르릉 희한하게 오는 여우비에 쫄딱 맞으며 퇴근을 했다. 헐레벌떡 일어나 출근하느라 우산도 챙기지 않은 내 잘못이긴 했다. 비에 젖은 여름옷이 마치 물에 빠진 솜이불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잠깐 침대에 기댄 다는 것이 그만 까무룩 잠이 들었다. 가스요금 밀렸다는 전화에 깨보니 어느덧 저녁때. 다 귀찮고, 남이 차려준 음식이 먹고 싶었다.
그래서, 카사블랑카에 갔다. 저 멀리 모로코에 있는 카사블랑카 말고, 용산구 H.B.C.(해. 방. 촌.)에 있는 '카사블랑카' 샌드위치 집에.
이 곳 카사블랑카는, 모르는 길로만 걷다가 발견한,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장소다. 첫째, 무엇보다 샌드위치가 저렴한데다 엄청나게 맛있고, 둘째, 이 곳에서는 이방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자주 이방인이었을 때의 감각이 그리워진다. 대부분 여행지에서의 감각인데, 기억 혹은 추억과는 달리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낯선 도시의 출근길 냄새랄지, 처음 가보는 나라의 동전 촉감이랄지, 처음 맛보는 과일의 떫은맛이 그렇다. 내가 이방인이라서 친절을 베풀어준 현지인들의 포옹, 악수, 따뜻한 물 한 잔의 감각도 있다. 이방인이 이방인을 알아보는 눈인사의 따뜻한 감각도 있다. 그리고 뜻을 알 수 없는 외국어의 멜로디. 특히, 그 외국어와 외국어가 만들어내는 화음, 박자. 이런 것들이 나는 종종 무척 그립다. 서울에서 나는, 너무 많이 알아듣는다. 상대방이 나에게 하는 말뿐만 아니라, 그 말과 다음 말 사이도 알아듣고, 말이 끝난 후의 침묵도 알아듣는다. 하지만 박자는 자꾸 놓치는 나 자신을 본다.
이 곳 카사블랑카에서는 언제나 처음 듣는 음악이 흐른다. 그리고, 성격 좋은 모로코 주인장이 상냥하게 각국의 언어로 맞아준다. 워낙 붙임성이 좋고 시원스러운 성격이라 거의 모든 동네 주민과 친구다. 울적할 때는 이곳에 앉아만 있어도 기분전환이 된다. 한국어 영어 불어 아랍어로 온갖 손님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여행 온 것 같기도 하고, 무거운 마음이 살짝 가벼워지는 것도 같다. 다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의 경쾌함 때문이려나. 나는 이 곳에서 다시 이방인이 된다. 사실 여기서는 모두가 이방인이다. 이 것이 내가 이태원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닌 척 무리해서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조금 더 자유롭다는 것.
이 곳의 모로칸 치킨 샌드위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다.
다진 마늘 넣은 마요네즈 소스와 겨자. 굵직하게 튀긴 감자, 커리파우더로 양념한 큼직한 닭가슴살, 토마토, 피클, 약간의 할라피뇨가 그날 구운 바게트 빵 속에 들어있다.
창밖을 바라보면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분홍 반바지를 입은 흑인 여자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가 상기된 얼굴로 길을 건너며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심통을 부린다.
"왜 월요일엔 문을 안 여는 거예요!"
그녀를 보자마자 모두 웃음을 터뜨린다.
"오우 노우~~!"하며 엄살 부리는 주인장과
"난 매일 너네 음식을 먹고 싶단 말이야!"라고 주인장을 화요일부터 닦달하는 그녀.
슬리퍼 질질 끌며 반바지에 탱크톱 입고 들어오는 백인 아저씨. 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두 손바닥을 위로 보인다.
"What's going on?"
오늘 왜 이렇게 한산하냐고, 드디어 망해가는 거냐며 꺼이꺼이 웃어재낀다. 주인장과 직원분들은 화요일은 원래 이렇다고 발끈하는 척을 한다.
낄낄낄낄 하하하하
역시나 이 곳에 오면,
몸의 무게는 더할지언정 마음의 무게는 덜고 간다. 이방인이어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