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통 Apr 05. 2016

앨리스는 이제 여기 산다.

[앨리스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를 보고

나는 종종 꿈을 꾼다.

아침 일찍 눈을 뜨고 린넨 커튼을 열고 창문을 연다. 창문 앞에는 책상이 있다. 그저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책상과 의자면 된다.  책상 앞에 앉으면 내 앞에 파리가 펼쳐진다. 쥐가 나오는 옥탑방이든, 입김이 하얗게 보이는 냉동실이든, 파리면 된다.  그곳이라면 나는 주옥같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아침 새벽 공기를 마시며 글을 쓰고, 해가 노릇노릇할 때쯤 밖으로 나가 파리 골목골목을 걷고,  매일 저녁 센 강에 비친 파리를 바라보고, 셰익스피어 서점에서 책을 읽다 지쳐 집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틀림없이 행복할 것이다. 나는 매년 4월 1일 이면 다짐에 다짐을 한다. 내년 4월 1일 에는 꼭 파리고 있겠다고. 4월 1일은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러니까 서울의 꽃샘추위에 바들거리다가 파리에 왔더니, 인상파 그림 속에 내가 서있던 날이었다.


어느덧 세월은 쏜 살같이 흐르고, 나의 꿈도 어느새 저만치 떠내려가 있다. 하루하루 눈을 뜰 때면 창가에 프렌치 린넨으로 만든 커튼이 살랑이기는커녕 '살아가는 일'이 내 머릿속에 넘실넘실 멀미를 일으킨다. 그래도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버릇처럼 말한다. 나는 파리로 갈 거라고. 아무도 날 막지 못한다고.


영화 속의 앨리스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다. 어릴 적부터 가수를 꿈꿔온 그녀는, 그때부터 성격이 보통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고분고분한 주부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툭하면 화를 내던 남편이 사고로 죽어버렸고, 그녀와 그녀의 괴짜 아들 토미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새로운 인생이란 게 일단 살 곳을 정하고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죽고 나서야 피아노 앞에 다시 앉는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깜짝 놀랄 만큼 노래를 잘하지 않고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노래하는 일을 구하는데, 그마저 웬 깡패 같은 놈이 꼬이는 바람에 내팽개치고 아들과 다른 곳으로 줄행랑을 친다. 


앨리스는 어쩌면 좋단 말이냐. 곤히 자고 있는 아들 녀석을 보니 앨리스는 의지가 끓어오른다.

토미, 널 꼭 몬트레이로 데려가 줄게. 

앨리스에게 몬트레이는, 그녀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곳. 오빠와 깔깔거리며 그들만의 공연도 하고, 노래도 했던 어린 시절이 있는 곳이다. 


앨리스는 지금 애리조나주의 '투싼'에 있다. 앨리스는 곧바로 웨이트리스 일자리를 얻는다. 일은 고되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그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앨리스는, 가수고 뭐고, 몬트레이로 가야 한다. 여기 투싼에서 몬트레이로 갈 돈을 벌어야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몬트레이로 가는 거다. 

이쯤 되면 헷갈리기 시작한다. 

앨리스, 그냥 여기서 행복하면 안 되는 거야?


안 그래도 앨리스는, 여기서 괜찮은 남자를 만났다. 번듯한 농장도 있고, 토미도 아들처럼 챙겨주고, 주방에는 조리도구들도 갖추고 사는, 턱수염이 보드라운, 매우 잘 생긴 남자. 하지만 그가 며칠 전 아들 토미가 버릇없이 구는 바람에 혼내다 엉덩짝을 세게 때렸는데 거기서 그와 대판 싸웠다. 아이에게도 심하게 대했다. 여기서 그녀는 다 관두고 싶어 진다. 가수고 뭐고 남자고 뭐고 다 모르겠다. 매일 죽어라 일해도 뭐 하나 달라질지 모르겠다. 아니, 그녀는 이제 헷갈리기 시작한다. 내가 원하는 게 뭐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데 말이다, 앨리스는 매일 정신없이 토스트와 써니사이드업 계란 프라이를 나르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이 나도록 웃고, 울다가 웃다 하면서 점점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던 중이었다. 급기야,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는 성질 한번 제대로 질러버린다. 턱수염이 보드라운 남자와  식당이 떠나가라 으르렁 싸운다. 



-난 당신과 토미 곁에 있고 싶어요. 그게 내가 원하는 거요. 그런데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건 뭐요?

-나? 나 가수예요. 가수 할 거예요. 

-잘 하기는 해?

-그, 그, 그래요! 아주 잘해요. 내 앞가림할 만큼은 해요. 이제부터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다 가수 되는 일이랑 연관 있어야 해요.


앨리스, 말 더듬었어!


-몬트레이 가는 건 뭐요? 

-이 멍청아! 난 거기서 행복했다고!!

그녀가 꽥하고 소리를 지르자, 남자도 꽥하고 말한다. 

-당신은 여기서 행복할 수 있어!

그렇게 몬트레이로 가고 싶으면 당장 짐 싸라고. 내가 당장 데려다주겠다고. 나는 농장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그 말에 앨리스는 바로 성난 마음이 녹아버려서 환한 미소를 짓는다. 해피엔딩이다. 


앨리스는 이제 여기 산다. 

아들 토미는 몬트레이보다 투싼을 더 좋아한다. 아니, 그녀가 몬트레이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녀는 이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 

그녀가 아들 토미와 걸어가는 길 저편으로 광고판이 하나 보인다. 거기에 뭐라고 쓰여있냐 하면, 바로 



'MONTEREY'

몬트레이다. 앨리스는 아들과 몬트레이 쪽으로 걸어간다. 


올해도 4월 1일이 지났다. 4월 1일마다 나는 속이 쓰리다. 불안하고 초조하다. 하필이면 또 만우절이라 더 그렇다.  하지만 내 앞에 책상에도 큼지막한 'PARIS'글씨가 박힌 엽서가 있다. 에펠탑 사진도 있다. 난 그걸 바라보면서 글을 쓴다. 타닥타닥 자판 두들기는 소리는 발자국 소리가 돼서 내 방을 울린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여기서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이제 여기 서울에 산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를 지켜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