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랍스터]를 보고
영화'더 랍스터'를 봤다고 했더니 친구가 어떻더냐고 물었다.
음... 좋은데 되게 잔인해 라고 대답했다. 친구가 많이 잔인해? 그래서 응 좀 많이 잔인해, 근데 많이 좋아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친구는 에이 그럼 난 안 볼래 난 잔인한 건 싫어.라고 했다.
그 대화를 나눈지 몇 주 후인가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 웃긴 영화를 보고 왜 잔인하다고 했냐고. 잔인한 게 어디 나오냐고 묻기에,
(영화 내용이 포함됩니다.)
비스킷 여인이 죽을 때 내는 소리,
그리고 마지막 장면.
이라고 대답했다. 난 이 영화에서 그 두 장면이 정말 섬뜩했다. 특히 비스킷 여인이 자살을 시도한 후, 죽기까지 그녀가 내는 소리는 외로움과 고통의 액기스 같았다. 정말 극장에서 귀를 틀어막았다. 아직도 종종 생각난다. 그런데 어디가 잔인하냐는 질문의 답을 찾자니 조금 난감했다. 그러고 보니 말릴 정도로 잔인한 장면은 별로 없는 거다.
친구 말대로 정말 웃긴 영화긴 했다. 건조한 듯하면서도 과장된 그들의 짝짓기 게임도, 자유를 위해 솔로를 고집하는 숲 속 군상도, 커플이 아니면 잡아가는 사회도 모두 코미디였다. 심지어 커플이 아니라면 인간이길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 황당한 이야기가 지금 내가 사는 세상과 너무 닮아서 납득이 되는 것이다.
혼자일 때는 혼자여서 겁이 나고, 둘일 때는 그, 혹은 그녀가 나와 같지 않아서 겁이 난다. 아니, 나와 다른 사람은 견딜 수 조차 없다. 커플에 성공하는데 사랑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치 않다. 근시인지 난시인지, 코피가 잘 나는지 잘 안 나는지와 같은 황당한 이유일지언정 너도 나와 같다면 받아들여진다. 끼리끼리 어울리지 않으면 안 된다. '너는 내 운명'이라는 허상은 이렇게 억지로 만들어진다.
솔로들의 집단은 또 어떤가. 절대 혼자여야 한다. 그들 또한 다른 이와의 신체 접촉도 안되고, 누군가와 연인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어마 무시한 형벌이 내려지며, 봐주는 법도 없다. 워낙에 커플을 강요하는 사회였으니 그들의 저항에 나름 마음이 갔더랬다. 그러나 그것 또한 코미디이고 말았다. 너도 나처럼 혼자여야 한다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이게 다 뭔가.
다들 너무 어린아이 같다.
우기기 떼쟁이 대장이다.
심지어 이 영화에서 가장 보드랍고 말랑말랑하고 후끈했던 커플마저.
날카로운 속내를 드러내고 만다. 그 속내는 어찌나 응큼하고 약삭빠른지 바로 코앞, 눈앞까지 와있다.
나는 네가 아니다. 나는, 너와 다른 독립체인 '나'라서 '너'라는 독립체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내가 미안해서 하는 말이다.
내가 기어코 너를 쫓아가서 니 손에 송곳을 쥐어준 것이 생각나서. 네가 그 송곳으로 눈을 찌르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불고 한 내가 생각나서. 낄낄 아닌 척 웃다가도 그 날카로운 장면들에 찔려 피가 줄줄 흘러서.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그렇게 잔인했던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