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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통 Apr 11. 2016

나는 중심이다.

[이다]를 보고





나는 항상 직선에 약했다. 어릴 적 미술시간이나 일상생활에서 직선을 그려야 하거나, 종이를 직선으로 잘라할 때, 난 항상 삐뚤빼뚤 이었다. 자를 대고 해도 이상하게 직선이 힘들었다. 숨을 참고 한 번에 그어봐도, 조심조심 자에 바짝 붙여서 그어봐도, 나의 선은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왔다. 가만 보면 다른 아이들은 쉽게, 곧게 직선을 그었다. 나는 잘 못 그은 선을 지우고 다시 선을 긋는다. 연필에 너무 힘을 주어, 지워도 지워도 자국은 남고, 겨우 직선에 가까운 마지막 모양은 울퉁불퉁 얼룩덜룩이다. 나에게 직선은 어려웠다.


단정하게 무채색으로 필요한 것만 스크린에 놓은 듯한 영화 '이다'에는, 쭉 뻗은 직선이 많이 나온다.  

의심 한 번 없는 믿음은 얼마나 단단하며 또 얼마나 깨지기 쉬운가. 의문을 가져본 적 없는 믿음이 복 될지는 모르겠으나, 평범한 사람에게 그런 믿음은 독선이 되기 십상이다.이다는 아기 때부터 수녀원에 맡겨져 자랐기 때문에 그녀의 믿음과 인생은 선택의 여지없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생각도 못했던 그녀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해 알게 되고, 지금까지의 인생이 뒤흔들릴 위기에 처한다. 아니, 그렇게 흔들려야 정상인데, 영화는 일관성 있게 침착하고, 이다도 그저 그 진하고 큰 눈만 동그랗게 뜰뿐이다. 그저, 이모와 이다가 과거를 밝히기 위해 떠난 여행길의 차만, 비포장 도로에 덜컹덜컹 흔들린다.

 사실 갑자기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거나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겪었을 때, 대부분의 하늘은 무너지지 않으며 땅도 갈라지지 않는다. 마음이 그럴 뿐이다.  영화는 이렇게 이다를 가만히 내버려두면서, 대사보다 이미지로 이야기한다.  영화는 장면 하나하나에 공을 들여서 인물들과 정물들, 배경을 배치하면서 그 마음 들을 공들여 수놓는다. 







수녀의 삶도, 유대인의 삶도, 어떻게 보면 그녀에게는 그저 강요된 두개의 삶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 진짜 이다인지. 혹은 옳은 선택인지.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녀가 수녀로 살아야 하는 이유와, 유대인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아마 수도 없이 많을 거다. 모두가 소중한 이유고 타당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스크린 속에서 비로소 그녀가 중심에 서는 순간이다.이다가 아무리 그녀의 믿음대로 바르고 곧게 살아도, 스크린 속의 그녀는 항상 조금씩 중앙에서 벗어나 있다. 그녀의 얼굴 자체가 스크린 구석에 걸려 입부분이 잘리기도 한다. 의심이나 의문 한 번 없는 믿음은 진정 그녀의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여기서 믿음은 '인생'이란 단어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직선 하나 제대로 긋지 못하는 나는 의심 한 번 없는 숭고한 믿음을 믿지 않는다. 흔들림 없이 직선을 긋기란, 생각보다 매우 어렵단말이다. 


이다는 그동안 올곧게 걸어도 스크린에서 가장자리에 간신히 걸쳐져 있었지만,

마지막 그녀가 선택해서 걷는 길에서는, 삐뚤삐뚤 걸을지언정, 중심을 차지한다.

그저 주어졌으니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번쯤이라도 의문을 갖은 후, 내 길을 걷는 것. 그 길이 얼마나 울퉁불퉁할지라도 나는 비로소 내 인생에 중심에 서게 된다.


내가 중심에 서는 것,

그것은 얼마나 단순하고도 어려운지. 그리고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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