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를 보고
독립하여 혼자 살고부터 나는 어른이 됨과 동시에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내가 번 돈은 월세며 고지서, 생활비 앞에서 맥을 못 추었고, 독립한 그 집은, 계약 기간이 끝나면 철새처럼 떠나야만 했다. 떠나야만 할 때 늘 새로 시작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마냥 설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막연한 막막함이 언제나 따라다니곤 했다. 나는 아직도 미숙한 것 같은데, 한 사람의 번듯한 성인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자꾸 누가 등 떠 미는 것 같아서 엉거주춤 좌불안석이었달까.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서도 이렇게 쓸쓸한데, 하물며 이민 자랴! 사실 비교 자체가 미안하다.
마리옹 꼬띠아르가 연기한 영화 속의 에바는 모든 걸 감수하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곳으로부터 벗어나 미국으로 왔다. 미국 이민국 심사대 앞, 동생과 설레서 나눈다는 이야기가, 우리 여기서 결혼도 하고 애도 많이 낳자!라는 지극히 소박한 꿈이다.
미국으로 이민하고픈 외국인, 유일한 혈육인 이모네만 바라보고 온 두 자매. 그 마음이나 생각이야 비뚤어졌든 한 여자의 사랑을 원하는(그는, 감히 사랑을 구하지도 못한 것 같다.) 지독한 남자. 그들은 어딘가로 들어가고자, 어딘가에 속하고자 한다. 국경이 있고, 벽이 쳐진 건물이 있고, 개별적인 인격을 갖춘 몸이 있는 한, 경계는 어디에나 있다. 심지어 물리적인 경계도 이러한데 보이지 않는 것까지 더하자면 사는 게 왜 이리 팍팍하고 외로운지 납득이 된다.
에바는 마음이 무겁다. 어깨도 무겁다. 돈도 한 푼 없는데, 어떻게든 동생을 빼내 올 때까지 버텨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한다. 도와달라고 쫓아온 남자(브루노)는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잘 모르겠지. 하지만 그놈 없이는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지, 그렇게 이를 악물고 버티며 그놈을 미워하다 나 자신도 미워진다. 그런 그녀에게 새로운 무게를 보여준 사람이 바로 올란도다. 그는 중력을 거스르는 남자다. (뮤지컬 위키드의 'Defying gravity' 가 떠올랐다.) 그 무거운 시대에, 그는 에바 앞에서 공중 부양하는 마법을 펼쳐 보인다. 그렇게 신기루처럼 0그램의 삶의 무게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에바는 올란도를 만나고서 생기가 돌고 행복해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올란도는 의외로, 등장만큼 가볍게 (? 혹은 금세) 사라진다. 그는 오히려 브루노의 무게를 상대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무너진 장면이 있는데,
올란도가 에바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브루노에게 총을 겨눈다.
"그녀를 떠나겠다고 말해. 이제 다시 나타나지 않겠다고. 떠나겠다고 말해."
그녀를 떠나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총구를 갖다 대는데, 브루노는 부들부들 떨면서 그 말을 못 한다. 심장마비로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떨고 있는데 죽어도 그 말을 못 하는 거다. 올란도는 브루노를 이해 못한다. 올란도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결국 그 총은 가짜 총이었고, 허허허 웃으며 뭘 그리 심각하냐며 너스레를 떠는 올란도에게 나는 배신감이 들었다. 그가 말한 희망이 달콤한 미래가 0그램으로 느껴졌다.
한편 브루노는 에바의 중력이 된다. 미워하고 원망될지언정 땅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고백에서 억장이 무너지고, 그가 얼마나 악마인지 알게 되지만, 그 악도, 그녀가 그래서 겪은 힘든 시간마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은 아니다.
You are not nothing.
이라는 에바의 대사는, 브루노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으리라. 사랑이라는 말, 집착이라는 말도 충분하지 않은 그 감정은, 그녀와 브루노가 실제로 느끼는 삶의 무게였을 것이다. 누가 그들이 당기는 중력을 조롱할 수 있을까. 그냥 떨쳐버리라고 훨훨 날아오르라고 쉽게 조언할 수 있을까. 그 또한 그들의 인생이었고 안고 살아갈 'thing'(것)인 것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떠나는 두 사람을 한 프레임에 잡는다.
그들은 그렇게나마 스크린에 함께 한다. 나란히 떠나가는 그 모습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