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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통 Apr 30. 2016

단, 앞을 바라 볼 것

[퐁네프의 연인들]을 보고




내가 퐁네프의 연인들을 처음 본 때가 십여 년 전이었다.

아... 이런 영화였구나. 다시 본 퐁네프의 연인들은 새로웠다.

그리고, 이렇게 응원하는 영화인지 몰랐다.

이렇게 사랑을 응원하는 영화인 줄 미처 몰랐네 정말.





그해 겨울 그와 나는 엄청 걸어 다녔는데,

그가 나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면, 나는 아쉬워서 그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이젠 그가 아쉬워져서 다시 나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를 무한 반복했었다.

그러다가 둘이서 캔커피라도 사 먹을까 싶어 편의 점에 들어가 동전을 냈는데,

그 동전을 받은 알바생이 깜짝 놀라며

"아니, 왜 이렇게 동전이 차갑죠?"

우리 둘 다 차가운 동전밖에 가진 게 없었지만, 우린 툭하면 깔깔깔깔 웃었고, 언제나 붙어 다녔고,

그게 정말 자연스러웠다.


저 장면에서 그때의 그와 내가 생각났다.

수북이 쌓인 눈이 안 춥고 포근했던 그때의 우리. 그러다가 각자의 집에 들어가면 그제야 꽁꽁 언 발이 간지러워 벅벅 긁던 그때.

아무도 우릴 이해해주지 않는 것 같아도 그 사람만 곁에 있다면 모든 이해를 다 받은 듯하고,

혹시나 헤어질 상상만 해도 눈에서 눈물이 데굴데굴 굴러나오던 그때..





영화 속에서 알렉스는 미셸을 항상 따라다닌다. 어딜 가든 무얼 하든 멀리서 따라가고 숨어서라도 지켜본다. 내가 울컥했던 장면중 하나는, 쿨쿨 잠든 미셸을 보고, 알렉스는 조급해져서 잠이 오지 않는다며, 나도 자야 한다고 한스에게 수면제를 조르는 장면이었다. 그녀가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같이 하고 싶었던 걸까. 왜 바보같이 조급한 마음까지 들었던 걸까 알렉스는.


영화 초반부에,  한 남자가 알렉스에게 조언을 한다.

파리에만 행복이 있는 게 아니야. 같이 남쪽으로 가자.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알렉스는 난 다리로 갈 거라고 고집스럽게 말하고는 바로 파리의 퐁네프 다리로 돌아온다.

영화 초반부에서 그는 어두운 파리 시내를 만신창이가 되어 걷다 쓰러진다.

심지어는 자기 이마빡을 아스팔트 바닥에 갈기까지 하는데...-.-;;; 나중에 이어지는 한스와의 대화를 볼 때 그것은 알렉스가 괴로워서 술을 마신 후에는 종종 벌어지는 상황인 걸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쉽사리 던지는 사람. 그게 절망이든 사랑이든. 그러고 보니 그는 거침없이 불을 뿜는 사람이다. 일하고 올게라며 덤덤히 말한 후에 그가 하는 일은, 입에 한가득 머금은 기름을 뿜으면서 불을 토하는 것이다.






한 편 미셸은 떠난 사랑도, 곧 잃게 될 시력도 꿈도 두려운 아가씨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계속 말 못 하고 언젠가 나에 대해서 말해줄게라고만 한다. 하지만 한쪽 눈이 텅 빈(실제로 비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는 마치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셸은 퐁네프 다리에서 알렉스를 만났고, 험난한 길거리 생활에서 그 사랑 덕분에 안전할 수 있었다.





예쁘게 보이거나 멋지게 보이려 그다지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이 하는 거라곤, 함께 있는 것. 함께 웃고 걷고 보고 먹고 마시고 자는 것. 하지만 어찌나 아름다운지. 이렇게 영화적으로 아름답게 사랑에 빠지는 연인을 표현한 장면이 또 있을까. 당장은 퐁네프의 연인들의 불꽃놀이 장면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비로소 옛사랑에게서 도망쳐나온 미셸, 잃은 줄 알았던 그녀가 돌아와 너무나 기쁜 알렉스. 그들의 머리 위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 미셸은 그제야 꾹꾹 참았던 총알들을 공중에 쏘고, 알렉스는 절뚝거리던 다리의 깁스를 벗어 재낀다. 아랍어로 된 에스닉한 노래가 나오는가 하면 계속 아코디언 소리는 흐르고, 락앤롤도 나오고 힙합, 왈츠, 클래식까지 온갖 노래가 그들을 감싼다. 그들은 온갖 몸짓으로 반응하고 춤춘다.



아, 첼로 씬은 또 어떤가...

이 장면은 보다가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줄리엣 비노쉬의 빨갛게 상기된 그 간절한 얼굴,

목숨 걸고 뛰는 드니 라방. 미로 같은 지하철역. 역내에 절절하게 퍼지는 첼로 소리.


못 산다 증말.


이 씬을 본 후에 불꽃놀이 씬은 정말 벅찰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말 좋았던 장면.

술 먹고 꽐라 돼서 술병만 해진 알렉스와 미셸. 숨넘어가게 웃는 그들은 어쩌다 2리터짜리 술병만 해졌나.





이 영화는 그저 소외된 힘없는 연인들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절뚝거리고, 안 보이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한 번 끝까지 가보는 연인의 사랑이야기.

우리가 지지고 볶고 부대끼는 그 자리가, 그게 다는 아니다.


"넌 너무 겁이 많아."

알렉스가 다시 돌아온 미셸에게 말한다.

나는 그 대사에서 엄청 뜨끔했다.


나도 겁이 많다.


그간 도망 다니고 숨기며 아닌척했다. 하지만 그는 알아봤다. 그도 나한테 너무 겁이 많다고 했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냐고.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나락으로 빠져 익사하지 않았다.

이 영화를 이미 몇 번이나 봤으면서도 혹시나 결말이 슬픈 사랑의 대명사 '엘비라 마디간' 같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밖으로 나왔고, 지나가는 배를 잡아 탔으며,

결국, 끝까지 가기로 한다. 그 배는, 마침 끝(남쪽)으로 가는 배였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항상 그녀를 쫓기에 바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와 함께 앞을 바라본다. 그리고 좀체 영화 내내 보기 힘들었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내 그들은 역시나 술 취한 모드로 낄낄대며 그들의 퐁네프 다리를 떠난다. 파리야 잘 있어라, 하고

멋지게 작별인사를 날린다. 이제 행복해지러 가는 거다. 파리에서만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면서, 이거 응원의 영화구나.

겁 내지 말고, 바보처럼 낄낄 웃으며 행복하라는, 니 마음껏 사랑하라는 응원의 영화구나.

물에 잠기지 말고 올라오라고, 그게 다가 아니라고. 앞을 보라고.



퐁네프의 연인들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다시 보지 않았으면,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좋은 줄 몰랐겠지.

나와 너의 사랑을 응원해주는 영화가, 이 세상에 하나 정도는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겠지.  



연인들이여, 2리터짜리 병만큼 쪼그라들도록 웃어재껴라.

단, 앞을 바라볼 것.

혀가 꼬이고 배가 당길 만큼 웃어재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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