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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통 May 18. 2016

어쩌면 살과 뼈가 있는,

[곡성]을 보고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영화 마지막, 무명(천우희)이 혼란스러워하는 종구(곽도원)에게 말한다. 

"그냥 믿어."

세상에, 이런 난리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그냥 믿으라니. 내가 왜 당신을 믿어야 하는지, 아니 누군지 충분히 설명해주지도 않고 그냥 믿으라니. 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 당신 눈에는 안 보이냔 말이다. 하지만 또 믿으라고 하는 사람(사람인지 아닌지..)은 나름대로 속이 탄다. 나는 여자아이를 살리려고 이러는 거라고. 제발 새벽닭이 세 번 울 때까지만 기다리라고. 그때까지만 좀 기다려보라고. 하지만 그때 그녀와 대치하고 있는 도사, 일광(황정민)이 종구에게 전화를 하고,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하는 종구에게 "절대 현혹되지 말라"고 한다. 인상적인 것은, 종구가 무명과 지금 함께 있다고 하니 벌벌 떨었다는 거다. 그 여자가 보이냐고, 보이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게 정말 큰일이라는 듯이. 


영화는 성경구절로 시작한다. 믿음에 대한 성경구절이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장 37절~39절

 아마 성경만큼 믿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 책도 없을 것이다.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무엇을 믿느냐. 추상적인 신의 존재를 마냥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믿으라고 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구구절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영화가 시작부터 성경구절을 인용했기도 했거니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기독교에서 이단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결정적인 사실 중 하나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는지를 믿고 있고 왜곡시키지 않았는지의 여부다. 죽었다가 살았다는 것을 믿느냐, 아니냐.


 믿으라고 종용되는 것들은 대게 믿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 유령(영)이 아니라 손과 발과 살과 뼈가 있는 몸을 가지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  

 희망을 가지라는 것. 막막하고 다 끝난 것 같을지라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것.

 괜찮을 거라고, 지금 말도 안 되게 끔찍하고 고통스럽겠지만 괜찮을 거라고, 살아질 거라는 것. 

 모두 믿기 힘들다. 뜬 구름 잡는 이야기 같다. 때론 허풍 같아서 어이없고, 남 얘기라고 속 편하게 막 하는 것 같아 화가 난다. 

반면 두려움, 그것은 얼마나 쉽게 납득이 되는지, 납득도 전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리고 쉽게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믿음과 두려움은 얼마나 가까운지. 얼마나 한 끗 차이인지, 이 영화 곡성은 너무 잘 보여준다. 온갖 종류의 두려움을 극장 안에서 목격한 것 같다. 일상과 다른 이질감에서 오는 두려움부터 시작해, 나에게도 끔찍한 불행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기어이 그렇게 불행이 시작된 후,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무력감에서 오는 두려움 등등. 각양각색의 두려움이 다양한 장르로 변형돼 롤러코스터처럼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한다.  


  

영화 마지막이 돼서는, 관객도 종구만큼이나 혼란스럽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어떤 말이 진짜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그냥 어둔 극장에 앉아있을 뿐인데 정말 도대체 어떡하면 좋을지 심란한 고통을 느꼈다. 아, 얼마나 잘 만든 영화인 거냐. 

무명, 이름 없는 여자가 세 번째 닭이 울기 전, 끝내 기다리지 못하고 집으로 뛰어가려는 종구를 잡는다. 그녀가 사람인지 아닌지는 잘 몰라도, 살과 뼈가 있는, 잡히는 존재 인 것이다. 그냥 유령은 아닌 것이다. 

 사실, 우리는 확실히는 모른다. 종구가 정말 무명의 말대로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들어갔으면, 온 가족이 다 죽지는 않았을까? (플롯상으로 볼 때는 그녀가 덫을 놓았다는 것은, 정말 효력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효진 이는 괜찮았을까? 하지만, 영화 속 일본인의 마지막 대사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 1절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을 희망하는(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편견과 아집으로 대상을 바라보거나, 실체 없는 두려움을 대상화해 그저 손쉽게 두려움을 무마하는 것이 아닌, 

희망을, 죽었다가 다시 살았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보는, 긍정에의 용기. 두려움에 쫓겨 서둘러 내리는 결정이 아닌, 잠깐의 시간일 지라도 두려움에 저항하는 그런 믿음.  이 영화는 그런 믿음을, 무명을 통해 '실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살과 뼈를 갖은 실상의 모습을 하고서 말이다. 영화를 다시 떠올려보면 일광과 일본인과 신체적으로 접촉했던 장면은 없었던 것 같다. (나의 기억이 맞다면) 두려움은 어쩌면 실체가 없는 그야말로 유령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작정 왜 믿지 못하냐고 다그칠 수는 없다. 유령은 무섭다. 우리는 매일 두려움과 싸운다. 두려움은 저마다 각양각색이며, 경중을 가리기도 힘들다. 그 사실을 이 영화 곡성은 실감 나게 보여준다.(심지어 경험한 것 같은 환상통마저 준다.) 그것이 스릴러 요소와 호러 요소가 이 영화를 빽빽하게 채우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무명이 그토록 알아채기 어려웠을지 모르겠다. 저 멀리 서 있는 무명이. 얼마나 희망을 갖고 믿음을 갖기가 힘든지. 마치 일광이, 종구에게 정말 그 여자가 보이냐고 되물으며 쉽게 믿지 못했듯이.  

 어떤 미끼를 무느냐, 무엇을 믿느냐, 그것은 우리의 몫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가슴이 미어지고, 곡소리가 절로 나지만,

 어쩌면, 희망이고 믿음인 그것은 손에 닿기 직전이었던 걸지도 모른다.(영화 초반, 종구가 첫 사건 현장에서 '귀신 잡는 덫'인 풀을 만지기 직전, 누군가가 불렀던 장면이 있다.) 바로 저기 문을 나가서 왼쪽으로 돌면, 믿으면 살 수 있는 무언가가 쪼그리고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긴 밤은 다 끝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기다려달라고, 좀 더 기다려 보라고 소매를 잡았던, 그 무엇이 자꾸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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