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아이가 자기 전에 책을 읽어준 적이 있었다. (역시나 호기롭게 시작하고, 며칠 만에 그만두었다--;;)
방의 불을 끄고 아이 침대에 누워 책을 폈는데, 아이가 말을 건다.
웅: 엄마,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아기를 낳는 고통이라며?
나: 응. 그렇다고 하더라.
웅: 근데 아기는 태어날 때 엄마가 아픈 것보다 몇 배가 더 아프데.
나: 응. 맞아. 그렇다고 하더라.
웅: 그럼 세상에 태어나서 겪는 고통은, 태어날 때 겪은 고통에 비하면 별 거 아닌 거네?
나: @@...??!!!
웅: 아기를 낳는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인데, 그것보다 몇 배나 큰 고통을 이미 다 견디고 태어났으니까. 세상에서 겪는 고통은 다 그것보다는 적은 고통이잖아.
나: (헐...) 정말 그러네.. (대박. 우리 웅이가 철학자네, 철학자!)
나는 웅이의 통찰이 놀라워, 오버스러운 감탄사를 몇 번이나 연발했다.
문득 분만실의 풍경이 떠올랐다.
벌써 13년 전의 일이건만, 아직도 내게 분만실의 풍경은 생생하다.
가족분만실에서 13시간이나 진통을 하며 기다렸으나, 웅이는 나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웅이의 호흡은 자꾸 떨어졌다. 고심하던 의사는 나를 분만실로 옮겼다. 마지막으로 자연분만을 시도해보고, 바로 수술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시도에서, 웅이가 태어났다.
의사가 내 몸 위에 갓 태어난 웅이를 올려줬다. 꿈틀거리며 나를 보던 그 작고도 여린 아기.
웅이는 그 작고 여린 몸안에, 세상의 모든 고통보다 몇 배나 더 큰 고통을 이미 이겨낸 저력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저력은 아직도 웅이 안에 품어져 있다.
갑자기 내 옆에 누워있는 아이가 경이롭고, 위대해 보인다. 그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아이의 한계를 규정하려고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 웅아. 그래서 모든 아기는 무한한 존재라고 하나 봐. 이미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이기고 태어났으니, 세상에서 부딪히는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을 거 아냐.
웅: (후훗)
나:근데 우리는 멋대로 틀 안에 우리를 가두고, '이건 이래서 안돼', '저건 저래서 안돼' 그렇게 살아가고 있네. 사실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존재인데 말이야. 사실.. 엄마 요새 마흔 넘어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는 게 왠지 자신이 없어졌었거든. 근데 지금 너랑 이런 얘기 나누다 보니까, 힘이 난다. 마흔 넘어서 새로운 공부 하면서 겪는 시련도, 내가 태어날 때 겪었던 시련보다 별거 아닌 거잖아.
웅: 그렇지.
나: 엄마 다시 힘내서 열심히 해볼래.
웅: 우리 이제 책 읽자.(ㅋㅋㅋ 사춘기 아이의 급 대화 마무리 신호)
나: 그래
그날 읽었던 책에는, 우연히도, "인간의 능력"과 "스스로에 의한 제한"에 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오~~~!!'' 작은 함성을 질렀다.
인간은 무한한 존재다.
물론 인간은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가진다. 그러나 이 세상을 충분히 누리도록 창조되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한한 존재다. 어릴 때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도, 죽을 때까지 인간은 무한한 존재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고, 세상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내가 앞으로의 중년의 삶과 노년의 삶을 살아가면서, 지치거나 힘들 때, 무언가에 도전하였으나 포기하고 싶을 때, 자존감이 바닥을 쳐 그냥 되는 대로의 삶을 살고 싶어 질 때, 이날의 대화를 기억하였으면 좋겠다.
"나에겐 이미 극 고의 시련을 이겨낸 저력이 있다. 이번 시련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웅이가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면서, 역시 지치거나 힘들 때, 무언가에 도전하였으나 포기하고 싶을 때, 자존감이 바닥을 쳐 그냥 되는 대로의 삶을 살고 싶어 질 때, 이날의 대화를 기억하였으면 좋겠다.
"웅아. 너에겐 이미 극 고의 시련을 이겨낸 저력이 있단다. 그 시련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 엄마가 항상 응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