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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귤 Feb 27. 2021

안 축하하는 게 아니야

결혼이라는 숙제를 나만 못한 것 같은 기분을 털어내기

아끼는 언니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미세먼지도 별로 없고 봄이 한걸음 성큼 다가온 게 느껴지는 오후였다.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과 반가운 지인들의 얼굴을 본 기쁨도 잠시, 집에 와서 화장을 지우면서는 허전함이 또 밀려온다. 작년 즈음부터 결혼 소식만 들으면 꼭 축하하는 마음에 1+1로 붙어오는 정체모를 씁쓸함이다. 혹여나 지인들이 이 글을 읽고 괜히 미안해할까봐 걱정도 되지만, 이 감정도 언제까지일지 모를 이 시즌만 지나면 사라질 테니 잊어버리기 전에 나의 찌질함을 글로 박제해본다.




나는 웬만한 결혼식에는 꼭 참석하는 편이다. 좁고 깊은 인맥 풀을 보유한 터라 결혼식이 잦지 않은 만큼, 불가피한 다른 일정이 없다면 지방까지도 곧잘 간다. 결혼식이 기쁜 이유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 새로운 출발을 하는 자리인 동시에 그 자리에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때문이었다. 각자의 삶을 사느라 이런 날이 아니면 보기 힘든 반가운 이들과 예쁘게 치장한 모습으로 맛있는 것까지 먹을 수 있다니, 결혼식은 내겐 정말 잔칫날이었다.


그러던 나에게도 결혼식 권태기가 왔다. 결혼이 늦어지면 청첩장 받기 싫어진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던 언니들도 다 결혼을 하고(그 농담이 이제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친구들은 알콩달콩한 신혼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아가들이라고만 생각했던 동생들도 결혼 준비 소식이 들려오니 갑자기 나 혼자 '아직 결혼 못한 사람'이라는 표를 이마에 붙인 듯 창피했다. 배우 이보영이 어느 프로그램에서 말한, 모두가 과제를 마치고 떠난 교실에 나 혼자 남아 나머지공부를 하는 바로 그 기분...


게다가 결혼식장에서 또다른 청첩장을 받기도 하고(다른 사람 결혼식에서 사전 양해 없이 청첩장 돌리는  굉장한 실례입니다.), 근황을 나누다 피할  없이 또다른 결혼 소식을 고구마줄기처럼 접하다 보니 그렇게 좋아하던 결혼식도 이제는 마음을 단단히 무장하고 가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다들 풀어내는 결혼과 관련된 근황 앞에서 나도 비슷한 소식을 내놓아야만   같은데 기껏해야 나의 근황은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뿐이니.


내가 딱히 불행한 것도 아니다. 아니, 사실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새해부터 목표했던 운동도 뿌듯할 정도로 잘하고 있고, 의외로 적성에 맞는 공부도 잘 되어가고 있다. 부자는 아니지만 쪼들리진 않고, 가족들도 무탈히 잘 살고 있는 거 보니 (전지구적 기후변화와 코로나19 이슈만 빼면) 딱히 근심이랄 것도 없다. 적어도 그렇게 느끼곤 있다.


그런데 결혼 앞에서 왜 나는 이렇게 숙제를 못한 학생처럼 괜스레 작아지는 걸까. 사람이라면 응당 결혼을 해야한다고 외쳐대는 구시대적인 자아라도 마음에 사는 것일까. 매번 출금만 당하는 경조사 통장이 내 마음에 대고 분풀이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랑 놀 싱글 친구들이 줄어들어 생기는 심통인 걸까.


이유야 어찌됐든 나는 그냥 이 감정도 안고 가기로 한다. (개인에 따라 피하는 게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만) 이런 감정 때문에 소중한 이의 한 번뿐인 기쁜 자리를 놓치는 건 아까운 일이다. 다만 이런저런 이유로 밀려오는 씁쓸한 외로움을 부정하며 애써 감추지는 않기로 결심한다. 축하하는 마음만 들어야 하는데 난 왜 씁쓸한건지 자책하지 말자. 마음껏 축하하되 마음껏 외로워하자. (주의: 남의 경사에 가서 나 외롭다고 하소연하며 다니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렇게 하다간 아마 더 외로워질 수도...)


언젠가는 내가 결혼소식을 전할 수도 있을텐데, 그때 더더욱 세심하게 주위를 배려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 주위 모든 사람들이 결혼할 때까진 깨볶는 TMI 금지, 호들갑/징징 금지, 청첩장 줄 때는 와주는 이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전하기, 축하해준 사람들에게 감사인사 꼭 하며 진심으로 근황 묻기 등.


아무튼 주위 사람들보다 결혼이 늦어지거나 비혼을 선택한다고 해서 내가 혼자인 것에 항상 괜찮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그냥 어떤 날은 외롭게, 어떤 날은 자유롭게 지내다가 언젠가 올 나만의 그분과, 또는 싱글로서 행복해하며 살련다.


축하하지 않는 건 아니야, 내 축하는 100% 진심이니까! 이 센치함은 언니 탓도, 내 탓도 아니라구. 진심으로 축하하고, 신혼여행 잘 다녀와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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