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들의 무덤
"기 선배 전화요"
마감기간인 탓에 컴퓨터에 코를 박고 있던 어느 밤 회사로 전화가 걸려왔다. 김영우 선생이었다. 나는 애써 감정이 실리지 않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질끈 묶은 머리, 다 지워진 화장을 한 얼굴로 나는 그가 기다리고 있는 회사 앞 커피숍으로 향했다. 통유리 창으로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등을 돌려 홱 돌아서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발을 돌리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혹시 또 학교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내가 먼저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는 제가 낼 수 있는 용기란 용기를 모두 모아 이 자리에 왔습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난 후 그가 말을 꺼냈다. 갑자기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지난 여름 우연히 만났던 그 날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아마 제가 누구에게나 쉽게 제 과거를 얘기한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쉽게 얘기를 꺼냈으니까요. 지난봄 선혜 씨가 상담을 다녀간 이후 계속 선혜 씨 생각이 제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건 수지를 늘 보기 때문이기도 했고, 목련차를 매일 마시기 때문이기도 했을 겁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 여름방학 서점에서 선혜 씨를 봤을 때 낯설지도 갑작스럽지도 않더군요. 어쩌면 당연히 와야 할 시간이 왔던 것처럼 저는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선혜 씨의 눈을 봤을 때 저는 제 얘기를 해야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
그의 커피잔 위로 긴 한숨과 함께 물수제비가 지나갔다.
"그 날 선혜 씨를 만나고 다음날 저는 소금사막으로 떠났습니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으로요.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으로 여섯 명이 한 조가 돼서 떠났었죠. 하지만 저는 일곱 명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더군요. 민망하시겠지만 선혜 씨도 제 여행의 동행이었으니까요."
나는 떨리는 손끝 때문에 더 이상 찻잔을 쥘 수가 없었다.
"그 사막들 중간에서 기차들의 무덤을 봤습니다. 하얀 모래사막 가운데서 예전에 소금을 실어 나르던 기차들이 녹슬어 폐허가 되어버린 광경을요. 달리기를 멈춘 기차는더이상 기차가 아니라 녹슨 쇳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됐죠. 마치 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해야 할 어떤 것을 멈춰버린 제 모습 말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됩니다만"
"선생님 잠깐만요. 그러니까 저는 선생님 저는 수지 때문에 요즘...... "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수지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선혜 씨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
그가 말하고 있는 거였다. 나 혼자만의 백일몽이 아니었다고. 내가 느낀 그 설렘이 그에게도 함께 찾아온 거였다고. 하지만 그건 분명 내 상상력일 뿐이었다. 현실로 그 일이 다가온다고 생각하자 나를 그에게 맡기는 것도 그의 모든 것을 온전히 껴안는 일도 두렵고 버거워졌다.
"들어가 봐야겠어요. 아직 일이 더 남아 있어서"
나는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빨리 식히고 싶었다.
"선혜 씨 잠깐만요. "
어느새 뒤따라 온 그가 내 손을 붙잡았다. 뜨겁고 떨리는 그의 손이 마찬가지인 내 손을 잡은 거였다.
"다시 달려보고 싶습니다. 다시 힘을 내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