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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벨 Sep 09. 2022

인간실격,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습니다.

"마흔이 넘도록 아직 아이도 없고, 집도 없고, 시부모에게 사람대접도 못 받아. 나는 가진 게 하나도 없어."

입술에 힘을 빼고 공기를 섞어서 담담하게 말했다. 담담하게 전하고 싶었으므로. 그래야 남편의 마음이 아프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내 입술이 떨리고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도, 나의 마음도 아팠다. 


"허니문 베이비 가지는 사람도 많고, 결혼하면서 시댁에서 집 사준 사람도 많고, 시어머니에게 예쁨 받는 사람도 많은데, 많은 사람들에게 쉬운 일이 나에게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난 시절이 그리 순탄했었나 돌이켜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아빠와 함께 산 집은 지옥이고 공포였다. 아빠는 저녁에는 술을 먹고 소리를 질렀고 아침에는 술을 덜 깨서 소리를 질렀다. 잔뜩 웅크린 채 스무 해를 살고 서울로 대학을 와 벗어났다 싶을 때, 다시 언니에게 묶여 시골 개처럼 살았다. 언니는 술을 먹지 않고 아침저녁 소리를 질렀다. 내가 행복하면 언니는 짜증 냈고, 내가 불행하면 기뻐했다. 



그렇게 두 번째 지옥을 벗어나면 결혼 후에는 평화롭고 수월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남편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대학병원 응급실을 드나들 때도 미리 건강을 챙길 수 있다며 신이 기회를 주신 거라고 모두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일로 우린 고속도로에서 국도로, 돌이 많은 비포장 도로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웃었다. 그리고 불평하지 않았다. 신은 공평하니, 분명 선물이 주어질 거라 기대했다. 




마흔이 넘었는데, 열심히 웃고 열심히 살아온 보람은 어디에 있는 걸까. 대학병원에 입원한 남편을 간병할 때에도 시어머니는 당신의 힘든 하루를 내게 토해내었다. 여행을 가서도, 식사를 할 때도, 안부 전화를 드려도 시어머니는 불평과 투정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시어머니를 위로한 무수히 많은 보람은 어디에 숨은 걸까. 언젠가 내게 돌아오긴 할까. 애초에 내 것이 될 보람이 있긴 했을까. 


"내가 있잖아. 나를 가졌잖아."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에 남편은 말했다. 역시나 나는 울며 웃으며 답했다. 부부가 너무 사이가 좋으면, 아이가 잘 생기지 않는대. 만약 아이가 있는데 부부 금슬이 좋으면, 한 명이 빨리 죽는 경우가 많대. 모두가 긍정적으로 알고 있는 내 삶의 표피가 벗겨지고 숨겨진 불안함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럼 나는 너를 택할래." 위로가 되지 못했지만 남편은 최선을 다했다. 




-인간실격 재밌어? 왜 봐?

-나도 아무것도 되지 못했으니까.

-응?

-나도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 아무것도 되지 못한 그 긴 시간 동안 나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아서. 내가... 사라졌어...

작년, 밤새워 드라마 '인간실격'을 보는데 남편이 물었다. 극 중 전도연의 대사를 들려주었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고 느끼는 그녀가, 사라져 버린 것 같다는 그녀가 꼭 나 같았다. 그때도 남편은 최선을 다해 내가 좋아하는 대사를 함께 봐주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인간실격을 열었다.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여전히 보람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언니와 더 이상 연락하지 않고 시어머니는 6월 말 통화를 마지막으로 수신차단했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지만 상처받지 않을 자격은 있었다. 이대로 가면 내가 정말 사라질 것 같아 나를 지키고 싶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시어머니를 바꾸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의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나는 끝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헤어지려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날선 평가와 지적은 잠시 내려놓으셔도 괜찮습니다. 비방을 위한 공유는 사양하겠습니다. 아무런 평가 없이 그저 자유로워질 수 있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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