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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자녀 디자이너 Jan 18. 2017

숙면

월드컵 4강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어느 긴긴 겨울.

매일 새벽 별을 보고 출근해서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 어느새 저녁달이 떠있던, 야근과 특근이 일상인 힘든 나날이었다. 과도한 업무가 몇 달째 지속되어 몸이 천근만근, 터덜 터덜 한남동 언덕길을 걸어 내려가 퇴근 버스에 겨우 몸을 누이면 몇 분 못 가서 바로 숙면에 빠져들던 시절이었다.


숙면 : 글씨그림 #148


당시 현장 사무실은 지하였는데 정말 정신없이 바쁜 날은 하루 종일 볕 한번 못 쬐고 일을 했다. 최소 밤 10시가 넘어야 눈치 보며 어둑한 퇴근길에 오를 수 있는 마치 컴컴한 터널과도 같던 나날들. 주당 법정 근로시간이 무엇인지, 주 52시간이 어떻게 계산되는 것인지 상상도 못 하던 시절. 줄 야근을 하다가도 틈만 생기면 소주를 한잔 하러 가는 선배들이 그저 기인처럼 보이던 시절이다.


출근길에도 피곤에 절어 버스에서 숙면에 빠졌다가 정류장을 지나쳐 제때 버스에서 못 내리는 경우도 많았다. 내려야 할 단대 앞 정류장을 지나 1호 터널을 통과, 종로로 광화문 앞으로 마구 돌아다녀도 잠에서 깨지 못하면, '지각 + 택시비'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젊은 날.



그날도 정말 심하게 곯아떨어졌었다. 그러다 깜짝 놀라서 잠이 깼는데 창 밖을 내다보니 바깥은 전혀 예상 밖의 풍경, '아... 또 지각이구나!' 벌떡 일어나 기사 아저씨에게 버스를 세워달라고 절규했다. 그런데 막 내리려는데.. 이상하게 정류장과 보도블록이 친숙했다. '버스는 이미 돌아 돌아 분당까지 왔다는 것인가?' 순간 나는 혼돈에 빠졌다.


딱 이런 모습


그리고.. 곧 깊은 안도와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밖이 어두웠던 것은 새벽이 아니라 었던 것이고 그것은 내가 출근이 아니라 퇴근 중이었다는 의미었다. 지하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기어 나와 버스에 타자 마자 피곤함에 곯아떨어졌는데, 어찌나 깊게 잠이 들었는지 당황해 깨면서 새벽과 밤을 헛갈렸던 것이다.


늘 지각 콤플렉스에 시달려 살던 내겐 지옥이 천국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혼 날일도 없고 택시비가 깨질 일도 순간 마법처럼 사라졌다. 내리려던 버스에 겨우 다시 올라타고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왔다. 그리고 바로 씻고 쉴 수 있어서 얼마나 좋던지! 아침잠이 많이 없어진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너무 행복한 사건이었다.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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