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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순 Jan 20. 2022

5. 노인과 노거수

       지난 계절의 영광

 청주 시내 한복판에 있는 중앙공원이다. 공중 화장실 앞 수돗가에 커다란 양은솥 세 개가 걸려있다. 방한모자를 쓴 초로의 남자가 솥뚜껑을 열자 갇혀있던 하얀 김이 솟아오른다. 천막 안에는 고기를 써는 자원봉사자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푸른 조끼를 입은 어린 봉사자들은 어른 봉사자들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무료급식을 하는 모양이다. 나무에 걸어놓은 플래카드에 ㅇㅇ초등학교 동문회란 고딕체의 파란 글씨가 선명하다.
   

주변엔 노인들이 벽돌처럼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다. 마치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노인들의 시선은 모두 코앞을 응시하고 있다. 입은 굳게 닫혀있다. 깊게 패인 주름 사이에 두 눈만 느리게 껌벅였다. 껌벅거리는 창에선 한줄기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창 안은 침침하고 눅눅해 보였다. 날씨는 추웠다. 간간히 쌀가루 같은 마른 눈발이 주름진 얼굴에 닿아 힘없이 떨어졌다. 서둘러 중앙공원을 지나 중앙시장으로 갔다
   

중앙시장은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재래시장임에도 깨끗했다. 대형마트에 밀려 죽어가는 상권을 살리려는 안간힘으로 보였다. 휴일 아침, 시장은 소리 없는 활기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느린 발걸음과 달리 나의 눈은 분주하게 이 가게 저 가게를 맘대로 들락거렸다. 상인들은 손님맞이 준비로 한창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떡볶이와 오뎅으로 빈 속을 채웠다. 내가 마수걸이인 듯했다. 연료를 채우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중앙공원으로 갔다. 차가 그곳에 있었다.    


뱀처럼 기다랗게 이어진 사람 줄이 멀리서도 보인다. 급식이 시작된 모양이다. 배식을 받은 사람들은 하얀 플라스틱 그릇을  손에 받아 들고 종종걸음으로 앉을자리를 찾는다. 힐끗 넘겨다  육개장 그릇 위엔 김치가 올려져 있다. 주름진 손에 들려진 하얀 플라스틱 그릇은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둡고 무거운 감정들을 하나씩 불러냈다. 처음이다. 이런 광경은. 코끝이 맵다.  돌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시선은 하얀 육개장 그릇에 묶여있다. 좀처럼 열릴  같지 않던 입들이 열리고 연신 수저가 들락거린다. 얼굴은 대리석처럼 굳어있다. 사람을 등지고 혼자 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 드시는 분도 계신다. 나는 보지 말아야  것을   당황했다. 김훈 선생의 밥벌이의 지겨움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먼 곳으로 눈길을 돌리자 중앙공원 귀퉁이에 쫄쫄 호떡집이 눈에 들어온다. 인터넷에서 맛집으로 소개된 집이다. 먹어보기로 했다. 한 개에 1000원. 기름에 튀긴 호떡이다. 쫀득쫀득하다. 벤치에 앉아 먹고 있는데 비둘기 한 마리가 겁 없이 내게로 온다. 가만 보니 비둘기 등이 움푹 패였다. 커다란 상처였다. 누구의 돌팔매질에 맞은 게 틀림없다. 등 여기저기 희긋희긋 비둘기 배설물도 묻어있다. 비둘기 사회에도 왕따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다. 어젯밤, 누군가 먹다 흘렸을 호떡 부스러기는 한두 번 쫓아보더니 쳐다보지도 않는다. 내가 흘린 부스러기만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잘게 씹어 퉤 뱉었다.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연신 머리를 앞뒤로 흔든다. 상처 입은 등도 연신 위 아래로 흔들렸다. 비둘기에게도 먹는 일은 고달파 보였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발은 어디 가고 커다란 노거수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은행나무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질 만큼 둥치가 크다. 청주 문화재 기념물이다. 높이 20미터 둘레 5.6미터. 커다란 가지 두 개가 밑동에서 합쳐지고 있다. 봄이 되면 바람에 날리는 연둣빛 잎사귀들이 마치 카우벨 소리를 낼 것만 같다. 자르르 물결치는 가을의 노란 장관은 또 어떨 것인가. 체념한 듯 지난 계절의 영광을 다 버리고도 우뚝한 모습이 저리도 늠름하고 아름다운데.  
  

중앙공원을 등지고 걷는데 노인들의 불 꺼진 창이 발길을 막는다. 서울에 탑골공원과 종묘가 있다면 청주엔 중앙공원이 있다. 강 하구 삼각지에 속도를 못 이겨 퇴적된 모래알들이 입안에 씹힌다. 굽이굽이 상당산성에서도, 실지렁이 같은 수암골 골목에서도 잔상은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터벅터벅 걷는데 연탄 공예 체험방이란 노란 표지판 옆에 <걱정말아요 그대>란 문구가 웃고 있다. 하얗게 타버린 연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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