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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순 Jan 21. 2022

6. 마크 로스코의 색과 감정

              이해 너머의 영역

망설였다.

마크 로스코전 갈 사람들 신청하라는 공지가 떴다. 늦은 밤 귀갓길, 마중 나올 남편의 출장 ,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단체로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부담이었다. 그렇다고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주말을 이용해 혼자 다녀올까도 고민했다. 혼자만 아직 떠나지도 않은 귀갓길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때 같은 동네에 사시는 임 박사님께서 참여 의사를 밝히셨다. 박사님만 믿고 서울행을 결정해버렸다. 내게는 어둠 공포증이 있다.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마크 로스코전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스티브 잡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감성 그리고 단순함’이 이 두 사람의 교집합이라 생각하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 마크 로스코는 형체와 선을 없애고 색만으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고 스티브 잡스는 단순한 모양의 컴퓨터를 지향했다. 그리고 비정한 기계에 감성을 담았다. 내가 쓰는 애플의 아이패드는 화면이 부르르 떠는 기능이 있다. 이것이 기계에 담긴 감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크 로스코는 회화의 표현기법을 단순화시켰고 그에게 매료되었던 스티브 잡스는 디자인을 단순화시키지 않았을까 추측해보는 일은 쉽고도 즐거웠다.     


전시장으로 들어서자 마크 로스코의 작품 세계를 담은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몇 분 안 되는 짧은 영화였지만 그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림을 비즈니스의 대상이나 장식품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머릿속에 남았다.     


마크 로스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했던 내게 그의 작품은 충격이었다. 이해할 수도 없는 그림을 놓고 평론가의 멋진 말장난으로 그림 값을 올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도 했다. 정면으로 그림을 바라보라는 조언에 따라 그림들을 응시했다. 그가 인간의 모든 감정을 색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이해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색깔 뒤에 숨은 수수께끼를 푸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쨋든 나는 전시장에 왔고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과 예술품에 갇혔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그림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이전의 그림을 보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완성된 그림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던 그림들과는 달리 로스코의 그림들은 관객의 적극적 참여가 중요한 요소였다. 관객이 그림 안으로 들어가 마음의 울림을 얻었을 때 작품이 작품으로써 빛이 날 것 같았다. 나로서는 매우 어려운 주문이었다.      


색으로 감정을 나타내고자 했으므로 색에서 감정을 읽어야 했다. 밝고 가벼운 색은 밝은 감정들을 어둡고 두꺼운 색은 두려움 공포 같은 인간 감정의 어두운 부분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계가 없다. 어둠과 밝음이 묘하게 스미듯 겹쳐있다. 마크 로스코의 의도를 따라 미로를 헤맸다. 돌아켜 보면 마음속 감정들은  순수한  가지 감정이 아니었다. 행복하면서도 불안하듯 우리의 의식 속에는 수십 가지 감정들이 서로 조금씩 겹치면서 존재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덧칠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인간 무의식 속의 감정과도 같지 않을까. 인쇄된 사진으로 보는 것과 원작 앞에 섰을 때의 느낌의 차이는 바로  무의식의 부분, 덧칠의 흔적이 가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종종 우리가 잿빛 우울 위에 화사한 기쁨으로 쓰윽 덧칠해 버리듯이. 너무 슬픈데  돌연 웃음이 터져 나오듯이, 분노가 갑자기 연민으로 바뀌기도 하는 것처럼.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덮는 거지.


관람을 방해하는 건 그림의 프레임이었다. 그림들이 충분히 컸음에도 그림이 더 커서 프레임이 시야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림과 좀 더 밀착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나의 느낌을 포착하지 않았을까 못내 아쉽다. 임시방편으로 손으로 대롱을 만들어 뷰 파인더로 사물을 보듯 그림을 보았다. 그림이라는 편견 없이 색을 보고자 함이었다. 집중이 더 잘 되었다. 색마다 주는 느낌이 명도에 따라 채도에 따라 미묘하게 차이가 났다.


채플 방의 첫 번째 그림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직도 뇌리에 선명한 그 그림의 제목은 기억에 없다. 한참을 바라보니 혼자 어딘가를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조용하고 엄숙하기까지 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의 무의식의 소리가 들릴 듯 말 듯했다. 면벽하고 참선하는 느낌. 고해성사실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그랬다. 누군가는 이 방에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바닥에는 고동색 방석이 깔려 있었다.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점심을 굶고 이곳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말로 꺼내지는 못했다. 돌아 나오면서 다시 한번 더 와야지 생각했을 뿐이다.     


마크 로스코 전과 이어진 충무로의 레드 공연도 미술 전시장의 연장처럼 느껴졌다. 색만으로 인간 감정을 표현하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었을까. 그 예술적 독창성에 박수를 보낸다.     


돌아오는 길은 어둠이 빛을 완전히 몰아낸 시간이었다. 한강이 보이고 내가 두발로 뚜벅뚜벅 걸어 다녔던 길들이 뭉개져서 창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장충 체육관. 여름이면 혼자 앉아 냉커피를 마셔대던 엔제리너스 커피숍, 팥빙수가 유난히 맛있던 태극당, 수업 후 단골 뒤풀이 장소였던 족발집 주변들. 추억이 밀려오고 밀려갔다. 시간은 나를 밀어내고 나는 동향 문우들과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은밀히 나의 지난 시간들과 조우했다. 어두운 버스 앞 작은 동그라미들이 붉게 10시 30분을 알리고 있었고 버스는 그 모든 것을 싣고 내차 고속도로를 달렸다. 긴 하루보다 더 긴 꼬리가 구불구불 길게 이어졌다.  (1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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