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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순 Jan 24. 2022

7. 읽는 여자

       잘 나이 드는 일

눈만 뜨면 하루 종일 책을 읽는다는 그녀의 하루는 노동이라고 했다. 도꾸리에 담긴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사케가 있는, 난방 잘 된 술집에 이야기가 낭자하다. 해방된 문자들이 물처럼 흘러나와 테이블을 적시고 식당 바닥을 적시고 열린 문틈으로 강물처럼 흘렀다. 직업적으로 책을 읽는 그녀가 부러울 지경이다. 갑자기 그녀의 노동이 따라 하고 싶어졌다. 몇 년 전, 술집 풍경이다.      


책상 위에 책이 탑을 이루고 있다. 읽은 책, 읽을 책, 빌려온 책. 닥치는 대로 읽고 있다. 하루 중 잠자는 시간 빼고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것이 읽는 시간이다. 나를 '읽는 여자'라고 스스로를 명명했다. 세상의 온갖 것을 읽어버리고픈, 책 속의 문장에 기대어 내 몸의 밀실을 들여다보는 일은 은밀하고도 즐겁다. 달의 뒷면처럼 볼 수 없었던 나의 어느 부분이 무의식 속에 잠겨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의식 위로 쏟아져 버린다. 선택의 여지없이 와르르. 그 기억들을 바탕으로 좀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페소아는 용기 없는 자들이 개혁가나 혁명가가 된다고 했다. 스스로를 변화시킬 용기가 없으니 타인과 세상을 바꿔버리려고 온 에너지를 쏟아붓는다는 것이다. 나의 책 읽기는 세상도 스스로도 바꿀 용기가 없어 책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야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영영 나오지 않길 바랐는지도.      


생각해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스스로 찾아들어간 도피처가 내겐 읽는 행위였다. 그런 행위를 통해 내 안에 국경 없는 왕국을 건설하고 그리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활보했다. 내가 구축한 세상에서는 모든 게 자유로웠다. 어쩌다 만나는 문장이 가슴을 뛰게 하고 때로 행동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며 미래의 어딘가에 반짝이는 순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했다. 그런 미묘한 변화를 통해 조금씩 내면이 밝아졌다. 자존감도 회복되었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힘도 생기곤 했다. 계절이 바뀌듯 이런 나의 도피행각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이렇듯 나의 일상에서 책을 빼면 별로  이야기가 없다. 가장 많은 시간을 읽으며 보내고, 가장 많은 돈을 책을 사는  소비한다. 물론 개인적인 소비면에서 그렇다. 어려서는 서점 주인이 되고 싶었다. 책을 실컷 읽을  있을  같아서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현실적으로 변했다. 서점 주인보다 그냥 읽는 사람이 좋다. 봄이면 햇볕  드는 창가 안락한 의자에  파묻혀 읽던 책을 얼굴에 덮고 오수에 빠지고 싶고, 여름에는 시원한 맥주를 홀짝이면서 달달한 연애소설을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넘기고 싶다.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여행지의   소파에 몸을 던지고 시집을 읽다가 간간히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다.  읽기에는 어느 계절도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계절은 겨울이다.  가로수가 휙휙 지나가는 기차 안에서, 보던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내리는 함박눈을 지긋이 바라보는 풍경이 내가 그리는 멀지 않은 미래의 풍경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나이 드는 것도 무섭지 않다.       


책을 읽고 책 속에서 길을 찾으며 잘 나이 들고 싶다. 그래서 평화롭게 나의 처음과 끝이 만났으면 좋겠다. 아쉬운 점은 점점 시력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점점 더 시력이 나빠져서 책을 멀리해야 한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그런 시간이 너무 빨리 오지 않기를... (2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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