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순 Jan 28. 2022

10. 내 안에 너무도 많은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은 수백 편의 단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저자를, 페소아의 영혼을 나눠가진 수백 명의 샴쌍둥이 같은, 다르면서 같은 작가라고 해야 할지, 동인이명의 수백 명의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페소아가 ‘우리의 존재라는 거대한 영토 안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수많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고 했으니 각각의 짧은 글들은 서로 다른 자아일 확률이 높고 실제 다양한 필명을 가졌으므로 결론은 상상에 맡기고자 한다. 이 글을 쓰는데 갑자기 안치환의 ‘가시나무’ 노랫말이 떠올랐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노랫말처럼 페소아의 뇌는 너무 많은 ‘나’들로 언제나 북적대고, 그래서 그가 쓴 글들은 온통 잿빛을 띄고 있는지도 모른다. 간혹 문장과 문장이 날카롭게 부딪친다.         


아무튼, 페소아의 불안의 책을 알게 되고 그 연결 고리를 타고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구매했는데 읽기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먼저 읽었다. 읽으면서 파스칼 매르시어가 불안의 책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았다. 먼저 세상에 나온 책은 어떤 식으로든 나중에 나올 책에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다. 책에서 책으로 지혜와 영감과 상상력과 감각은 옮겨 다닌다. 내 머릿속에 희미하던 포르투갈은 이 두 책으로 인해 막연히 스페인의 서쪽 어느 나라에서 홀연히 훌쩍 떠나고픈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아무 연관성이 없고 연관성을 갖추려는 의지도 없는 단상들 속에 나의 사실 없는 자서전, 삶이 없는 인생 이야기를 무심히 털어놓는다. 이는 나의 '고백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할 말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p 26)     



파도가 해변을 하얗게 덮쳐도 밀물에 쓸려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듯이, 오묘한 빛의 비눗방울이 허공을 날아오르다 어느 순간 소리 없이 펑펑 공기 중으로 사라지듯이 지금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럽고 때로 행복한 순간들도 감각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며, 삶은 순간순간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허무라는 단어가 가장 빠르게 쉼표와 쉼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모든 것은 이유 없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페소아는 다른 사람이 되어 나를 바라보면서 나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말한다. 이해해서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으로. 그러니까 고통은 고통으로 받아들일 때, 혹은 고통스러운 척을 해야 고통으로 감각된다는 것. 내 인생으로 나를 두들겨 패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통찰에 털썩 무릎부터 꿇었다. 나는 당신에게 복종하나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 하나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가 느낀 감각, 예리하게 조각돼 살아 꿈틀대는 순간의 느낌이라고 페소아는 담담하게 남의 일처럼 말한다. 사실 없는 자서전, 그리하려 삶이 없는 인생 이야기가 되겠다. 해석은 상상에 다름 아니므로 나의 상상은 경계를 허물고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       


누군가의 고백이 가치 있거나 쓸모가 있을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만 일어나는가, 아니면 모두에게 일어나는가.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라면 전혀 새로울 게 없고, 오직 우리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면 다른 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텐데. 내가 느낀 것을 글로 쓰는 이유는 느낌의 열기를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고백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느낌에 따라 풍경화를 그린다. 내 감각들로 휴식을 얻는다. <불안의 책 본문 중 >    

 



불안의 책은 음독하면 의미가 반감된다. 해서 소리 내어 읽으려고 노력한다. 몸이 만들어 내는 공기의 떨림으로 내 귀로 들어오는, 바닷가 몽돌 구르는 듯한, 자갈밭을 걷는 듯한 거친 목소리를 들으며 눈으로 글자를 밟고 지나간다. 눈으로 밟힌 문장마다 잉크가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와 읽고 지나간 페이지마다 하얗게 변해버리면 좋겠다. 그래서 다 읽고 났을 때 책이 하얀 백지로 남는다면...  어기적어기적 즐거운 상상을 하며 읽다 보니 속도가 느리다.


여기저기 쓰는  글들도 따지고 보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전문성이 높지도 않고, 사유의 깊이가 우물처럼 깊지도 않으며 일어난  또한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들뿐이다. 그러니  써도 좋을 글들인데 쓰는 이유를 페소아가 친절하게  놓았기에  몽당연필을 들고  밑에 좌악 좌악 밑줄을 그으면서 카타르시스에 젖는다. 작가가  마음속 풍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나와 함께 회오리를 일으킨다. 나조차도   없었던 나의 심연을 작가의 눈을 통해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점점 시야가 흐려지고  곳으로부터 광활한 문자들의 초록 들판이 펼쳐진다.  곳에서 들판과 하늘이 하나가 된다.  (190109)

매거진의 이전글 9. 모두의 해피엔딩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