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순 Jan 27. 2022

9. 모두의 해피엔딩인가

      베니스의 상인

수 십 년의 격차를 두고 베니스의 상인을 다시 읽었다. 누군가의 추천이 없었다면 이미 내용을 알고 있다는 뻔한 이유로 거들떠보지 않았을 작품이다.  읽었다고, 내용을 다 안다고 결코 끝이 아니다. 곱씹을수록 감칠맛이 난다.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르다. 그래서 고전은 역시 고전이라는 생각을 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과 독자와의 커뮤니티라고 한다면, 작품은 변했을 리 없고 아마도 독자가 변해서일 것이다. 그동안의 경험치가 변했을 것이고, 환경이 변했을 것이고, 읽는 이의 사회적 위치가 변했을 것이다. 이 모든 변화들이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사유의 깊이를 더하며, 줄거리 파악에 그치던 독서에서 삶으로 바짝 끌어당기는 삶의 소도구로 용도변경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므로 한 권의 책은 독자를 만나 유일한 책이 된다. 같은 책을 읽고 나면 그 후엔 각자 다른 책이 되어 서로의 기억장치에 남는 것 같다.     


책을 읽은 후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생각했고, 무척이나 가고 싶었으며 언제가 그곳에 가게 된다면 곤돌라를 타고 물의 골목들을 누비면서 우리들의 포셔와 샤일록과 안토니오와 바사니아를, 아니 어쩌면 재판이 열리던 법정에 시민 판정단으로 서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이 재판은 불공정하다고 용감하게 외칠 수 있을까? 좋은 결과를 위해서라면 과정의 모든 것은 용서받아도 되는 것인가? 법은 어디까지 관여해야 하는가?     


작품은 16세기, 그러니까 1598년 이전에 쓰여졌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배척이 고조에 달하던 시기다. 유대인은 게토라는 곳에 모여 살며, 해가 지면 문을 닫고, 낮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는 빨간 모자를 써서 자신이 유대인임을 알려야 했던 시기다. 토지도 소유할 수 없었으며 직업에 대한 제한도 많았던 걸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건 많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슬슬 작품 안으로 들어가 보자. 작품 안에는 세 가지의 플롯이 나온다. 금, 은, 납 세 상자 이야기, 살 1 파운드를 중심으로 한 재판 이야기, 그리고 반지 이야기다. 이 세 가지 플롯에서 번뜩 머리를 스치는 것은 ‘섣부른 계약’에 대한 경각심이다. 계약 자체가 공정한가? 세 상자의 선택이 과연 선택자의 사람 됨됨이를 판가름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과 자신의 가치에 상응하는 것을 얻는 것과 모든 것을 걸고 모험해야 하는 것 그 어떤 것도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외형이 다를 뿐이다. 반짝이거나 덜 반짝이거나 투박하거나. 그러므로 현명한 여성의 전형으로 묘사된 포셔의 선택에 의문이 생긴다.     


두 번째, 살 한 파운드를 둘러싼 재판 과정이다. 문맥 없는 결과는 논외로 하자. 여기서 돈 밖에 모르는 교활하고 잔인한 샤일록은 왜 육천 다카트를 포기하고 먹지도 못 할 살 1파운드를 고집했을까. 맞다. 살인이 목적임을 누구나 안다. 결국 살인미수로 그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샤일록의 잔인성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자는 것이다. 누구나 샤일록에 빙의되면 ‘죽이고 싶다’ 일 것 같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작품에서는 ‘죽이겠다’로 나타났다고 해서 샤일록을 그저 악인으로만 봐야 하는지 의문이다. 샤일록이 누가 봐도 재고의 여지가 없는 악인이라면 이 작품의 매력은 반감되고 만다. 만약 그렇다면 이 작품이 이렇게나 오래 살아남아 오늘날 내가 다시 읽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샤일록의 야누스적인 모습이 이 작품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판사로 변장한 포셔 이야기다. 해피 앤딩을 완성하기 위해 재판장에 포셔의 등장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해결에 의문점은 없는 가. 이 작품에서 유대인 샤일록의 입장에 서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샤일록의 유대인 친구 투발뿐이다. 다수가 부리는 수작 같다면 나의 꼬인 생각을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하는 수 없다. 마지막으로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부분에선 그만 내가 분노하고 말았다. 몸은 굴복당해도 마음은, 영혼은 굴복하지 않는 것이 인간일진대 어찌 법으로 인간의 마음까지를 움직이려 하는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왠지 모르겠다. 유대인만큼이나 재판정의 판결문이 잔인하다고 느꼈다.     


세 번째, 반지 플롯이다. 세 가지 이야기 중 그나마 재미있고 위트 있는 대목이다. 무거운 이야기를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로 가벼움을 더한 느낌이다. 맹세가 얼마나 가벼워지는 순간들이 있는지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증표, 믿음 이런 건 물건에 담는 게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것. 기필코 언젠가 바사니오는 포셔의 반지를 잃을 것만 같다. 젊은 재판관의 고집에 결국 넘어갔듯이 언젠가 우리가 상상 못 할 방법으로 세익스피어는 바사니아의 반지를 누군가에게 넘겨줄 것 같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건네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그래서 세익스피어는 또 위대함에 위대함을 한 줄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만약 세익스피어가 살아 있어 그 후속편을 쓴다면 말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재판장의 기독교인이라면 승리의 기쁨을 오롯이 느끼지는 못할 것 같다.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의 앙금이 남아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절반의 승리요 절반의 패배다. 세익스피어는 반유대 성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 작품만을 놓고 본다면 그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인간의 다양한 이면을 그려낸 것 같다.

그래서 더 빛난다. 그는 언어의 마술사 맞다. (210616)     


매거진의 이전글 8. 단 한 번의 소중한 시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