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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순 Jan 26. 2022

8. 단 한 번의 소중한 시도

         가자, 아브락사스에게로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 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이 없는 하나의 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며, 신성하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피조물이 괴로워하고 있으며, 누구 속에서든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민음사/ 데미안/ 서문 중에서>     


데미안을 안 읽은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책 자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령 읽지 않았어도 한 두 구절은 읽은 것처럼 또렷이 기억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워낙 잘 알려진 소설이기 때문이다. 데미안을 읽고 이 책을 과연 한국의 청소년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겠냐는 의문이 들었다. 일찍부터 철학을 배우고 토론을 생활화하는 몇몇 나라의 청소년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쉽게 읽어나가면 글자만 읽고 있을 확률이 높고, 진지하게 읽어나가자면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정답처럼 여겨지는 감상을 포기하고 내식대로 데미안을 맛보고 즐기기로 했다.     


읽은 모든 책을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는다. 그런 나를 컴퓨터 앞으로 이끈 건 ‘멍 때리기의’의 효용을 발견하고부터 뭔가 쓰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그러나 정작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 후로 일주일 정도 시간이 흐른 시점이다. 뭔가 기록을 하려면 다시 책을 들춰봐야 한다. 그렇게 첫 장을 읽게 되었다. 느닷없이 머릿속에 번개가 형광불빛을 내며 쩍 갈라졌다. ‘이거였구나’ 그것이 첫 번째 인용한 문장이다. 정작 책을 읽을 때는 그냥 읽어 넘겼던 부분인데 다시 읽으니, 헤세가 서문에 모든 것을 담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두 번째 페이지에서 진한 위로를 받았다고 할까. 서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인간이 되기를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가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풀이를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서문 중에서>     


결국, 세상에 돌로 던져진 우리 모두는 밝은 세상과 어두운 세상이라는 두 세계를 경험하며 괴로워 하지만 누구나에게 존재하는, 십자가에 매달린 구세주를 만나 즉 ‘나’에게 이르러 인간이 된다는 한 편의 성장 스토리다. 성장 스토리라는 점에서 청소년 필독도서가 되었겠지만 나라면 인생의 신맛 단맛을 조금은 알게 되고, 막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될 20대 초반에 읽었더라면 좋았겠다 싶다. 이미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라 아쉽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끝난 것도 아니고 여전히 내게 이르는 과정에 있어 이 책은 유효하다 하겠다.      


처음에 싱클레어가 속한 곳은 보살핌과 온기와 가족의 사랑이 있는 밝은 세계였다. 밝은 세계 안에서도 어두운 세계가 존재했지만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크로머의 등장으로 진짜 어두운 세계에 깊게 발을 들인다. 이제 더 이상 밝은 세계는 싱클레어의 어둠을 몰아내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모든 성장은 비가역적이다. 어떤 상태를 지나면 다시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본질적으로 다른 “내‘가 되는 것이다. 밝은 세상이 금이 가고 그 사이로 먹물처럼 어둠이 들어온다. 어둠은 점점 밝음을 지워버린다. 이때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도움으로 어둠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다시 부모님이 계시는 밝은 세상으로 돌아간다. 자신이 구축한 밝은 세상이 아닌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밝음 속으로 흡수된다고 볼 수 있다. 밝은 세상에 들어간 싱클레어는 모든 것을 부모님께 고백하지만 싱클레어는 또 다른 어둠의 세계를 데미안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기존 질서, 가치에의 의문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자기만의 고유 영역이 생긴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은 표적이 되어 눈빛에 나타난다. 그 표적을 읽은 자는 더 이상 싱클레어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 성장의 첫 번째 단계다.      


상급학교에 진학한 싱클레어는 이성에 눈을 뜨게 되고 술집을 드나들고 다시 어둠의 세상에 빠지게 된다. 또 동급생 누군가의 데미안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러다 이상형의 연인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되고 다시 밝은 세상으로 이동한다. 이때는 피동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밝은 세상을 구축해간다는 점에서 첫 번째 밝은 세계로의 회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싱클레어의 세계가 넓어지고 다양해진다. 성장의 두 번째 단계라 여겨진다.      


성장의 세 번째 단계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며 ‘나에게로 이르는 길’에 다름 아니다. 길은 사방으로 뻗어 있다. 싱클레어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꿈에 나왔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날카롭고 대담한 매의 머리를 가진 한 마리 맹금이었다. 몸의 절반은 어두운 지구 땅덩이 속에 박혀 있는데, 커다란 알에서부터 인 듯, 땅덩이에서 나오려고 푸른 하늘 바탕 위에서 애쓰고 있었다. 이 그림은 유명한 다음 문장으로 이어진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P122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이라는 말의 여운이 강렬하고도 길다. 헤세는 우연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 자신의 필요와 요구와 절실함이 그를 그것으로 인도한다고 말이다. 데미안의 독심술처럼 여겼던 것도 헤세 식으로 보면 간절함이 부른 결과인 셈이다. 싱클레어는 이런 간절함으로 아브락사스를 부른다.      


“희열과 오싹함이 섞이고, 남자와 여자가 섞이고, 지고와 추악이 뒤얽히고, 깊은 죄에는 지극한 청순함으로 충격을 주었다. 나의 사랑의 꿈의 영상은 그러했다. 그리고 아브락사스도 그러했다.” P126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에 대한 강한 열망에 끌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싱클레어는 음악이 좋은 이유가 도덕적이지 않아서이며, 그의 음악에서는 한 인간이 천국과 지옥을 흔들고 있음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아브락사스가 결국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게 해 준 셈이다. 피스토리우스가 알려준 아브락사스는 다음과 같다. 개인적으로 클라이맥스라고 느꼈다.      


“그리스인들이나, 중국인들에게서든 일찍이 존재했던 모든 신과 악마가 우리 속에 있어. 거기 있는 거야. 가능성으로, 소망으로, 탈출구로, 인류가 멸종하고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상당한 재능을 지닌 어린아이 하나만 남는다면 그 아이는 사물들의 전체 과정을 다시 찾아낼 거야. 그 애가 신이 되어 수호신, 낙원, 계율과 금기, 신약과 구약 모든 것이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거야.” p140     


인간이 이 모든 우주의 씨앗이라는 말을 이렇게 멋지게 하다니. 결국 싱클레어가 그토록 궁금했던 아브락사스가 내 안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가능성으로, 소망으로, 희망으로. 내 안에 이르는 길이 각자의 아브락사스를 찾아가는 길이라니....     


그 방법론으로 피스토리우스는 자신의 이층 방에서 모닥불을 싱클레어에게 보여준다. 아무런 설명 없이. 요즘으로 말하면 제대로 ‘불멍’이다. 싱클레어는 불을 들여다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며 한 번도 보살 핀 적 없는 내면의 성향들을 강화하고 확인시켜 주었다고 했다. 그 후로 싱클레어가 느낀 활기와 기쁨, 감정의 고조는 그대로 드러난 불을 오래 응시한 덕분이라고 했다. 불을 응시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기분 좋고 풍요로운 느낌을 준다고도. 이런 방법은 그림을 그리거나, 암석에 있는 색색의 물결, 구름, 연기, 기름얼룩을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여겨진다. 단순하고 반복적이고 지루한 것들 속에서 우리는 내면으로 쉽게 시선을 돌리고 숨겨진 각자의 신에게로 날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휴식과 여백과 무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도.

     

이렇게 세 번째 성장 단계를 거친 싱클레어는 더 이상 외부에서 무언가를 찾지 않게 된다. 가만히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 자신의 모습과 데미안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는 것은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전혀 새롭지도 이상하지도 않다. 싱클레어의 아브락사스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신에게로 날아가면 된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중받아 마땅한, 고유성을 간직한 그만의 아브락사스에게로.      


덧붙이자면, 마지막 부분에 데미안이 에바 부인의 키스를 싱클레어에게 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두고 여러 의견이 있는듯한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간절함이 부른 일종의 환각이 아니었을지. 사랑의 전형으로서의 에바 부인을 온전히 느끼게 되면서 이 소설은 마무리된다고 믿고 싶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소중한 시도로서 이곳에 존재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이보다 더 진하게 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너와 나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2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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