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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순 Feb 04. 2022

10. 가깝고도 먼  여행

                    '그냥 그래'

유체이탈. 유체이탈은 명상을 오래 하면 무의식이 아닌 상태에서도 가능하다고 하나, 안 하던 명상을 통해 유체이탈을 꾀한다면 연목구어 격이겠고 또 그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그렇게 해서까지 나의 민낯을 마주할 용기도 없다. 백주 대낮에 꾸는 백일몽이 차라리 어울리겠다. 가끔 이렇게 원하면서 원하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뭔지 모를 답답증이 알 듯 모를 듯한 것처럼.      


베란다 문을 여는 순간, 갇혀있던 감국 향기가 노랗게 밀려 들어온다. 며칠 전 산책길에 꺾어온 감국을 베란다에 놓았었다. 갑자기 국화차가 마시고 싶어졌다. 워머에 불을 붙이고 찻주전자에 차를 데운다. 영화음악과 은은한 차향과 병아리처럼 노란 감국 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떠나고 싶다. 작은 바람에도 정처 없이 떠도는 낙엽이 여행을 부추긴다.
 
 차를 마시면서 꿈을 꾸듯 일탈을 감행한다. 일상이 아닌 곳으로의 여행.  탈 것에 몸을 밀어 넣지 않고도 아주 먼 데까지 간다. 버스를  탔다가 기차도 타고 갑자기 아득히 먼 곳으로 순간 이동도 한다. 비행기보다 빠르다. 아니 번개보다 빠르다. 아침이었다가 갑자기 붉은 노을이 펼쳐지기도 한다. 선라이즈를 마주한 시간, 보랏빛 여명의 순간이 무질서하게 뒤엉킨다. 시간이 맘대로 흐른다. 의식의 흐름엔 계통이 없으며 머릿속은 점점 무정부 상태가 되어간다.
 
 이른 새벽 무작정 부산행 열차를 탄다. 안개 낀 새벽, 낙동강변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해운대 바닷가를 걷는다. 철 지난 바닷가는 막 내린 무대처럼 쓸쓸하다. 해변가 시멘트 계단에 앉아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사는 게 재미있냐?’고 묻는다. 구체적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다. 내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는 건 나랑 가깝다는 증거다. 이때 “즐겁다!”라고 말하면 싱겁다. 미네랄도 섞이지 않은 물맛이다. “죽고 싶다” 이런 대답을 들으면 또 삶이 대책 없이 무거워진다. 그래서 싱거움과 무거움의 어디쯤에서 타협을 한다.

      

‘그냥 그래’      


참 적절한 대답이며 궁극에 내가 찾는 대답이다. 많지 않은 나의 친구들은 주기적으로 나에게 이런 폭탄성 질문을 받는다. 대답은 뻔하다. “왜 또 그래” 나의 대답도 조건반사처럼 튀어나간다. “그냥”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영구 버전 대화로 멈췄던 피가 돌고 죽어가던 일상에 활력이 넘친다. 네가 내 가까이 있다는 확인. 투정이나 엄살, 억지 위로가 아닌 말 자체가 위로가 되는 말.      

 

너의 삶과 나의 삶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게 되면서 사적인 영역 깊숙이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모르는 영역은 모르는 채로 남겨 두기. 지난친 관심으로 행여 상처에 소금 뿌리는 짓을 하게 될까 봐, 굳이 더 나을 것도 없는 나의 삶이 싸구려 자랑질로 친구의 사는 맛을 앗아가게 될까 봐서다.  전화는 간단하게 끝났고 여운은 뱀 꼬리처럼 길다. 그리고 오래도록 바닷가를 걷는다.  파도소리가 영화음악처럼 낮게 깔리면서 멀어진다.
 

어느새 김장훈 콘서트장이다. 몸치인 줄 알았던 몸이 흔들린다. 소리도 지른다. 지금 여기 놓인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인다. 정해진 스텝이 없다. 어린아이처럼 깡충깡충 뛴다. 간단하다. 그런데 그 간단한 동작으로 머릿속이 맑아진다. 엔도르핀이 솟아난다. 어려서부터 엄숙 주의 내지는 권위주의가 병적으로 싫었다.

10   7080 콘서트장으로 무대가 바뀌었다. 친구 남편이 공연을 한다. 40 초반의 아줌마들이 정심화홀에 모여 친구 남편의 이름을 연호한다. 질세라 소리를 지르며 몸을 지그재그로 흔든다. 마치 광팬 같다. 무대에서  김장훈은 멋졌다. 프로답고 인간적이다. 콘서트에 임하는 자세가 프로다웠으며 자랑스럽지 못한 자신의 아픈 과거를 그대로 대중 앞에 보여줬다는 점에선 인간적이다. 나보다   삶을  살아낼 사람이  세상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자기 삶에 있어서 프로다. 가수가 노래하다 삑사리 났다고 무대를 포기할  없는 것처럼 힘들다고 사는 일을 멈출  없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느 순간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어느새 지난 시간의 벽을 뚫고 현재와 마주한다.
  
 
   모금을 입에 넣고 휘휘 돌려 목으로 넘기고 나니  집이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말하던 작가가 이번엔 ‘라면을 끓이며라는 책을 썼다. 서점에 나오자마자 읽고 있는 중이다.  예전 같으면 한달음에 끝냈을 책을 일주일째 붙잡고 있다.  읽기는 해치워야 하는 숙제가 아니므로 마음의 속도에 맞춘다. 이젠 다독에서 정독으로 무게중심이 바뀌었다. 독서는 모든 이유를 막론하고 즐거운 일이어야 한다. 읽다만 페이지가 오랫동안 멈춰있었는지 넘겼는데 되돌아온다. 다시 넘기고 독서대 고정핀으로 누른다. 사실 기성작가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건 아니지 하는 부분도 있다. 김훈 작가의 좋은 점은 간결한 문체의 명료성에도 있지만 포장하지 않아서  좋다. 아니 과대포장이 없어서 좋다. 형용과 부사가 적다. 누구에게나 밥벌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지겨움을 말한다는  용기처럼 보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우린  똑같은 , 호모 사피엔스다.
 

카카오스토리에 들렀다가 나의 연애타입 알아보기를 심심풀이로 눌렀다. 차도녀 차도남 스타일이란다. 용한 점쟁이 같다. 질문지  개인가  개로 유형분석을 했으니 결과는 백가지 종류를 넘지 않을 것이다. 속을 들킨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가지로 규정하기엔 나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다. 외향성과 내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나를 단정 짓듯 날아드는, 글과 말의 화살은 그래서 상처 없이도   속에 떠돌며 오래도록 아프다. 평생 우리는  사람을 제대로   있을까. 나는   있을까. 그게 가능하기는  걸까. 사물이든 사람이든 느낌으로만 인식한다. 단어는 무엇을 인식하기에 초라한 도구에 불과하다.
 
  어쩌자고 관념어가 바닥에서 치고 올라온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고맙다. 간단히 하면  말을 빙글빙글 돌린다. 변죽만  울린다. 김훈 작가는 모든 다가갈  없는 것들, 다가오지 않는 모든 것들을 사랑이라 부른다고 했다. 나는 여기에  문장을 덧붙인다. 그러면서 멀어지지 않는 모든 것들을 나는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은 말로써 표현 가능하지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다. 소멸되는 사랑은 가짜다. 사랑은 연민과 어깨동무하고 온다. 가끔은 그리움을 동반한다.  내게 있어 사랑은 둘이 하는  아니다.  사람이 사랑을 나눈다면  개의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은 나누어 가질  있는 성질이 아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사랑은 개별성을 지녔다. 보편적인 사랑은 두꺼운  속에나 존재한다. 개별성이란 단어를 쓰면서 김훈 작가를 다시 떠올린다. 독서의 폐해다. 달달함이 빠진 단문 쓰기는 나의 주특기지만 개별성이란 단어의 출현은 다분히 김훈 작가의 영향이다.
 
  “띵동 띵동
 택배가 왔다. 어제 주문한 5 서랍장이다. 서비스로 준다던 3 서랍장이 보이않는다. 현실은 냉혹하다! 빠르게 나의 손은   쇼핑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다.


(15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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