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뇌는 왜 이렇게 되었나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은 항상 시간이 촉박하다. 대개 내가 시간 계산을 빠듯하게 하기 때문이긴 한데, 의외로 시간이 넉넉하게 있어도 몸을 일찍 일으켜 나서질 않는다. 기어이 여유를 다 까먹은 뒤에야 문밖으로 나서면 당연히 발뿐 아니라 눈과 손도 같이 바쁘다. 어떻게 가야 1분이라도 더 빨리 갈 수 있을지 알아내려면 버스와 지하철들의 실시간 위치를 보고 경로를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봐야 대체로 이미 늦어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약속의 날짜를 정하는 건 쉬워도 시간을 정하는 건 항상 어렵다. 내가 늦을 게 뻔하니 30분 정도를 먼저 당겨서 만나자 하면 으레 그걸 계산에 끼워 넣고야 마는 약삭빠른 머리를 가져버려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그날도 약속에 조금 늦고 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생각보다 이르게 모임을 파한 덕에 아직 대중교통이 돌아다니는 시간이었다. 술도 좀 덜 마신 덕분인지 정신은 멀쩡하고 친구들하고 놀다 온 덕에 기분은 적당히 즐거운 상태. 버스도 그다지 오래 기다리지 않아 탈 수 있었다.
대충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흘러가는 풍경들을 살피다, 유리에 희미하게 반사된 버스 안 풍경도 흘겨보기도 하면서, 기사님이 이끄는 대로 멍하니 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두운 터널을 훅 지나면서 까만 벽 대신 유리에 비친 내 얼굴에 초점이 닿았다. 의식하지도 못한 채 입꼬리가 옅게 올라가 있던 게 보였다. 물론, 놀다 들어가는 길이라 기분이 좋기야 했지만 이렇게까지 좋을 일인가?
얼마 안 지나 터널을 빠져나가자 내 얼굴 대신 길가의 풍경이 보였다. 곧이어 버스는 시야가 확 트인 곳으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다시 긴장 풀어진 채, 무엇 의식하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난 지금의 이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중이란 걸 말이다.
약속 장소로 향할 때에도 물론 주변을 관찰하긴 한다. 다만 그건 이 경로가 더 좋을지 저 경로가 더 좋을지를 계속 견줘보고 있는 중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문제다. 내가 더 어떻게 시간을 당겨볼 수가 없게 모든 조건이 불가항력적일 때에나 잠깐의 짬으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지만, 그조차도 곧 환승 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길을 오가는 중일 땐 항상 최소한의 시간만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게 몸에 밴 것이다.
그러나 집에 가는 길은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았고, 얼마가 더 늦든 상관이 없었다. 언젠가 도착만 하면 그만인 거지. 그러니 그토록 풍경을 누릴 수 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자정 넘어 집에 들어갈 땐 항상 그랬다. 뭔가 마음이 느슨해져서 편의점도 들르고 자주 가지도 않는 골목길을 어쩌다 굳이 거쳐가고 말이다. 그렇게 늦어지는 만큼 사실 몸은 더 쉴 시간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은 좋아서 휘파람이 절로 나곤 한다. 그게 다 시간 제한이 없는 자유로움에서 오는 것이었다니.
뭔가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 들 때쯤 버스도 익숙한 길목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눈에 익은 풍경들이 그려지자 새삼 들뜬 기분이 이어지기보단 차분해진 감상으로 왜 이런 인간이 됐을까를 문득 생각해 보게 됐다. 이렇게까지 자유로운 기분일 수 있는데 왜 시간에 허덕이는 인간이 됐는지 말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경험들이 쌓였으니 이런저런 이유야 있겠지. 그렇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극단적 효율 추구가 이유이지 않을까.
약속 장소에 가야 한다는 사실은 뻔한데 먼저 이르게 도착할수록 내 시간은 손해를 볼 테니 그걸 최소화하고 싶은 마음과 이동하는 동안의 환승 시간이 딱 맞아떨어질 때 느껴지는 쾌감, 그 두 가지가 내 뇌를 절여놓은 게다. 특히나 계산된 완벽한 시간에 도착했을 때의 짜릿함은 지금의 편안함보다 더 큰 즐거움을 안겨주곤 했다는 점이 생각났다. 그래, 사람은 무엇을 더 추구하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거지.
그렇게 나름의 결론을 내릴 즈음 해서 환승의 시간이 다가왔고, 정류장에서 내려선 나는 다시금 지도앱을 펼쳐서 저 너머의 정류장에서 다른 버스를 탈 것이냐 좀 더 걸어서 지하철을 탈 것이냐를 고민하면서 발을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