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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Aug 19. 2023

편의점 회고록#3

커피사주는 아저씨.

성함도, 나이도 몰라. 당연히 사시는 곳도 모르고. 하지만 일주일에 두어 번, 요즘엔 삼 사일은 한 시간씩 꼭 나랑 수다를 떨고 가시는 아저씨가 있어. 옛날에는 믹스커피, 당뇨가 오려고 한 뒤부터는 기계로 내려먹는 원두커피를 드시지. 특징은 꼭 커피를 사 주신다는 거. 옛날에 믹스커피를 사 주실 땐 사실 커피를 마실 때보다 나중에 먹겠다고 하고, 나중에 아저씨가 가지면 다시 판매대로 가져다 놓은 적이 더 많았지. 원두커피는 맛이 괜찮은 편이라 사주 실 땐 늘 감사하다 하고 마시는 편이고.


이 아저씨를 나는 '사장님', 아저씨는 나를 '자네'(축구선수 아님). 이렇게 불러. 아, 나뿐만 아니라 아저씨는 아저씨가 커피를 사러 가게에 들르셨을 때 가게를 보고 계시는 분들에게 다 사주시는 것 같더라. 나처럼 대화를 이어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 왜 그러시는 것 같냐고? 음... 그러고 보니 물어볼 생각을 못해봤네. 그런데 왜 커피를 사 주시냐고 물어보면 당황해하시지 않을까? 무례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직접 물어보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다만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내 추측은, 삶의 소소한 낙(樂) 중에 하나가 아닐까?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이야기도 하고 싶고. 이 시골에서 바(bar) 같은 데 가서 술 홀짝이며 할 정도는 아니지만 자주 가는 편의점에 가서 커피 한잔 하며 할 이야기 정도는 되는.


싫지는 않냐고? 맞아. 아무리 호의를 베풀어도 상대가 부담을 느낀다면 호의라 보기 어렵잖아. 특히나 요즘 같은 '용건만 간단히'가 (많은 경우에) 예의인 시대에는 더 그렇고. 그런데 이 아저씨는 그걸 아시는지, 손님이 많거나 내가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커피만 사주고 가셔. 눈치가 빠르시달까? 물론 가끔 손님이 없을 때 글을 읽거나 게임을 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때 아저씨가 오시면 조금 귀찮을 때도 있어. 그렇다고 내가 멀티태스킹이 잘 되는 건 또 아니라 아저씨 말을 들으면서 게임을 하거나 글을 읽진 못해서 말이지.


하지만 또 장사라는 게 물건을 발주하고, 온 물건을 정리하고, 매장을 관리하는 것 보다도 훨씬 잘해야 하는 일이 서비스, 그러니까 접객이라서 호의를 베풀고자 하시는 손님들의 호의를 거절하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야. 그래서 직업상의 이유가 반, 개인적인 친분이 반 정도로 감정이 들어간 상태에서 대화를 하는 것 같아.


개인적인 친분이 쌓였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 같은데, 진짜 친한 친구가 온다 한들 일 하는 와중에 한 시간 가까이 대화를 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대화라는 것도 흐름이 있고 분위기가 있기 마련인데 누가 시킨다고, 또 억지로 한다고 이어갈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런데 이 아저씨랑은 대화가 잘 돼 ㅋㅋ


티키타카도 잘 되고(내가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걸 잘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일상에서 도움이 되는 조언들도 많이 받았어. 특히 건설 현장에서 오래 일을 해 오셔서 그런지 주택 관리에 관한 전문적인 노하우들을 많이 알려 주셨거든.

나도 나름 군인 시절에 논산훈련소 조교로 복무하면서 훈련병 막사를 수도 없이 고쳐봤거든. 벌초, 등(燈) 갈기, 변기 뚫기, 세면대 고치기, 타일 붙이기, 전기 스위치 교체 등등... 이런저런 집에서 발생하는 잡스러운 고장들은 혼자서도 잘하곤 했는데, 이게 잡지식이고 얕은 경험이라서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사람을 불러야 하는 일이야. 그런데 또 이런 게 딱 깊어진 그만큼만 알면 할 수 있는 일인 건데, 그 조금의 깊이에 대한 것들을 아저씨한테 많이 배웠지. 덕분에 엄마와 아내에게 아주 든든한 남편도 될 수 있었고 말이야.


요즘은 내가 결혼을 해서 그런지 이 아저씨랑 나누는 대화 주제가 아저씨 아들에 관한 이야기야. 서른 중반의 나이를 가진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 글쎄 아직까지 장가를 가지 않았다고 아주 걱정하고 계시더라고. 아무래도 내가 사는 곳이 시골인지라 서른만 돼도 혼기가 꽉 찬 노총각, 노처녀 대우를 받고 있으니 걱정하실 만도 해. 그리고 또 아저씨 나이 때 어른들은 자식 자랑하는 낙으로 사시는 때라 얼른 장가도 보내고 손주도 보고 싶나 봐. 물론 은근히 좋은 직장, 바른 성품에 대한 자랑을 하시긴 하지만 ㅋㅋ


아저씨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었어. 서울에서 피시방도 운영해 보시고 100명도 넘게 수용 가능한 고시원도 운영해 보셨다고 하더라고. 피시방 이야기를 할 땐 알바들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로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고, 고시원은 그 시절 노량진에서 엄청나게 잘 됐었는데 사모님이 한번 과로로 쓰러지신 이후로 다른 사람에게 팔고 처갓댁이 있는 이곳으로 오셨다고 하시더라. 이 아저씨도 참 다사다난하게 사셔서 인생 이야기를 할 때면 빠져드는 맛이 있더라.




장사를 하다 보면 힘든 순간들이 많아. 알바문제, 손님문제, 건강문제, 가족끼리 장사할 땐 가족들과의 경영 스타일 차이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회사랑 계약문제도 있어. 장사가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걱정하고 살면 걱정만 하고 살다 죽을 것 같고,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고생만 하다가 죽을 것 같은 게 장사, 자영업이거든. 하지만 또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어? 장사뿐만 아니라 무얼 하든 '생각하기 나름'이란 생각은 먹고사는 일에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세상만사 좋은 일만 일어날 순 없지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좋은 일이 좋은 일인 줄 알고 그것을 삶을 살아가는 양분으로 삼을 수 있다면 조금 더 세상을 밝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 아저씨의 가게 방문과 이어지는 대화들도 일이라 생각하면 귀찮고 부담스러운, 그래서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지만... 인생 선배와의 지루하지 않은 대화, 쉬어가는 시간으로 생각한다면 배울 것도 많고 가게를 보는 재미 중 하나가 되는 것처럼 말이지. 말 그대로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랄까?


뭐, 물론 모든 손님과의 대화가 이 아저씨처럼 이어지진 않아. 무례한 사람도 있고 부담스러운 사람도 있어. 하지만 모든 상황과 사람이 그럴 것이라는 편견이나 닫힌 마음 때문에, 찾아와 말을 거시는 모든 손님들과 일어나는 돌발 상황을 스트레스로 안고 가는 것보다는 한 번씩 찾아오는 긍정의 신호들을 잘 구별해서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일 하면서 원형탈모가 생기는 일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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