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하고 멋진 일
5년 전 이맘때쯤. 오랜 기간 동안 알바가 없어서 편의점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 기억하기론 반년정도 18시간씩 쉬지 않고 일을 했었을 거야. 이대로 살다 간 야간에 가게 보다가 잠깐 엎드려 자는 새에 죽을 것 같아서 억지로 억지로 알바를 구했어. 원래라면 절대 구하지 않았을 사람을 채용했지. 알바를 구하는 것도 나름의 기준이 있어. 나중에 뒤에서 하나의 챕터로 알바 구인에 대한 썰을 풀긴 할 건데, 어쨌든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채용했었어. 그리고 모아둔 돈으로 여행을 계획했지. 머리 좀 식힐 겸 재충전도 할 겸 해외 배낭여행을 준비했어. 아주 막연하게. 축구를 좋아하니까 유럽으로 가볼까 하고서.
(그러고 떠난 여행은 준비부터 순탄하지 않은, 조금의 우여곡절이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지나간 발자국에 담은 일기'라는 여행 에세이를 발간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그렇게 나는 가게를 내팽개치듯 어머니에게 다 떠넘기고 유럽으로, 로마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었어. 숙소와 대륙간, 도시 간 이동하는 교통편 말고는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아, 축구 경기는 다 예매를 했었고, 나머지는 어떤 것도 계획되지 않은 여행이었어.
혼자 떠나는 여행은 분명 어려움이 있었지만, 반대로 아주 매력적인 여행이기도 하더라. 혼자 있고 싶을 땐 혼자,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을 땐 여행객이라는 신분으로. 현지인이면 현지인, 한국인이면 또 머나먼 이방 땅에서 만난 동포(?)라는 반가움에 편안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지.
유럽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국인이고 현지인이고, 다른 나라에서 여행을 온 외국인이고 간에 다들 긍정적이고 열린 마음이더라. 나뿐만 아니라 다들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마음과 체력을 재충전하기 위해 떠난 여행인 만큼 풍기는 기운 자체가 아주 밝았던 것 같아.
유럽에 도착하고, 아니 유럽으로 출발하는 비행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열흘 정도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났어.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버스 안에서, 강둑에서 멍하니 물결을 바라보다가, 숙소에서도. 편의점을 하면 다양한 손님들이 오니까 일을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냐- 할 수 있는데, 맞아. 그렇게 친해진 손님들도 있어. 하지만 대부분의 손님들은 물건을 사러 오지 사장을 만나러 오진 않잖아. 만나도 사석에서 만나겠지. 그러니까 손님들을 여행에서 만난 사람과 비교하지는 말자 우리.
어쨌든 여행 중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어떻게 오게 됐냐, 나이는 어떻게 되냐, 무슨 일을 하냐, 이 나라 이 도시에서 어떤 곳을 가 봤냐, 다음 행선지는 어떻게 되냐- 와 같은 여행 중에 만난 사람과 할 법한 대화부터 시작해서. 대화하다 보면 말이 잘 통하고 결이 맞아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꺼내기도 했지.
종교에 관한 이야기, 나와 같은 나이의 남동생을 둔 누나의 고민, 결혼과 연애에 대한 가치관, 레알마드리드 축구팀에 관한 심층적인 전력 분석까지. 그리고 내 이야기 중 빠지지 않은 것은 역시나 꿈에 관한 이야기였어.
글을 쓰고 싶고, 작가가 되어 글로 돈을 벌고 먹고 싶다고. 그러기 위해 편의점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 이곳을 떠나 도전을 해 보고 싶다고.
한국에서 친구들과, 인생 선배들과, 멘토라 여기는 사람들과, 부모님과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현실이란 부분들이 개입하게 돼. 어디서 글을 쓸 건지. 작가로서 몇 년 동안 준비를 해야 먹고살 만큼, 나아가 결혼 후에도 가정을 꾸릴 수 있을 만큼 벌 수 있는지. 그 준비기간 동안 들어갈 돈은 얼마가 필요한지. 대부분 돈과 시간에 관련된 현실적인 이야기 들이었지. 아, 그게 절대로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꼭 필요한 이야기지. 하지만 이런 꼭 필요한 현실적인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꿈에 다가가기 위한 길 위에 놓인 장애물을 찾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아주 도움이 되는 이야기지만 한편으론 기세가 꺾이고 주눅 들기도 해. 더군다나 나 같이 글을 쓰려고 편의점 일을 시작했는데 주객이 전도되어 가게에 붙들려 언제 타자를 쳐 봤는지 기억도 안나는 사람한테 현실적인 이야기는... 장애물을 넘어 절망과 통곡의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지.
그런데... 유럽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해주더라고.
"멋지다! 대단해요!"
안정적인. 어쩌면 대한민국 소득의 평균을 넘어서는 수입에도 불구하고 꿈을 위해 떠나려는 내 도전에 경의를 표해 주었어. 뿐만 아니라 아무리 가업이라지만 젊은 나이에 편의점 사장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대단하다 해 주었지.
고향에서는 어머니 지인분들, 나를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사람들은 가게를 보는 나에게 무슨 일 하고 있냐고 물어봐. 이 가게를 어머니와 함께 운영할 거라고 이야기하면, 대부분 딱하다는 듯이... 또 멀쩡하게 생긴 놈이 이런 일이나 하고 있냐는 듯이 말을 해. 조언이랍시고 직설적으로 장사꾼이나 하려고 대학을 나왔냐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외로운 도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들의 대단하다는 말이, 멋지다는 말이 참 위로가 되더라. 내 용기를 치기라 생각하지 않고 멋진 도전이라 말해 주었고 글을 쓰기 위해 선택한 가업을 성공한 인생이라 띄워주었어. 물론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들이고 대부분 한국에 돌아가면 사는 곳이 달라 억지로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마주치지 않을 사람들이기에 무책임하며 듣기 좋은 입에 발린 말을 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속마음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 멋지다는 말 한 마디가 분명 꿈을 향한 내 외로운 싸움에 힘이 되고 응원이 되는 순간이었다는 걸 부정할 순 없었어.
유럽 여행을 끝마치고 한국에서 약 2주간의 정비를 한 뒤 나는 상경했어. 꿈을 위해.
결과적으로 어머니가 허리를 크게 다치셔서 6개월 만에 다시 귀향해야 했고 이전보다 더 본격적으로 가게를 운영해야 했으며 매출이 계속 오르는 바람에 일단은 가게에 집중하자 생각하고 일을 하다가 결혼도 했고, 훗날엔 아이도 생겨서 점점 글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갈 것 같아.
하지만, 잠시지만 가게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홀로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면.
꿈을, 가게를 멋지다 말해주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6개월이나마 오직 꿈만을 생각하며 살아보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나를 언제나 응원해 주고 지지해 주는 아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나간 일에 가정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과거에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우리 가족을 지탱하는 가게를 보고 내 꿈을 방해하는 족쇠라 생각했을 것이고 꿈을 위해 도전하지 못한 지난날의 나를 후회하며 살고 있지 않았을까?
시골의 여느 편의점 사장이 그렇듯 자신이 하는 일과 마음속에 품은 꿈에 자신감을 가지고 모두 후회 없는 인생을 살면 좋겠다.
아~ 요즘 점점 장사꾼스러워지는 것 같아 조금 우울했는데, 비가 주룩주룩 오는 오늘 같은 날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걸 보면 아직은 글을 쓸 만한 감성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은 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