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 아침이 밝았다. 해는 잘 떠 있었으나 뭔가 습기가 낀 날씨였다. 역시나 빨래가 잘 안 말라 있어서 배낭에 양말을 주렁주렁 매달고 길을 나섰다. 아, 전날 먹고 남은 호식이두마리치킨도 함께 했다. 걷다가 출출해지면 아침으로 먹을 생각이었다.
이날도 갈 길이 멀고 멀었다. 영덕을 지나 포항까지 가야 했다. 포항의 최북단에 위치한 화진해수욕장까지 가는 길. 해파랑길 코스로는 19, 20, 21코스를 지나는 길이었다. 하지만 먼저 고백하자면 20코스는 뛰어넘었다. 영덕의 산길을 걷는 등산코스라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냥 바닷길로 쭉 갔다. 아래 지도에서 20코스가 지나는 산이 보이는가. 신이시여.... 산 위에서 보는 바다 풍경이 정말 멋지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도저히 임파서블...
숙소를 나서 1시간 정도 걸었을까. 영덕이 자랑하는 '영덕해맞이공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덕군에서 꽤 잘 꾸며놓은 모양새였다.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공원인데 산책로도 잘 조성되어 있었고 꽃과 나무도 예쁘게 심겨 있었다. 전망대도 2개나 있어서 먼 바다를 감상하기에도 그만이었다. 마침 그날은 토요일이라 나들이 나온 관광객도 많았다. 우리도 슬슬 출출해져서 벤치 하나에 자리를 잡고 무겁게 이고 지고 온 치킨을 뜯었다. 갓 튀겨 나온 치킨이 선사하는 그런 천상의 맛은 아니었지만 몸을 쓰고 먹는 간식으로는 그만이었다.
그렇게 단백질 보충을 하고는 걷고 걷고 또 걷고. 확실히 주말이어서 그런지 차도 많고 사람도 많았다. 그만큼 슈퍼나 편의점, 카페, 식당 등 편의시설은 많아졌지만 울진에서 느꼈던 고즈넉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길에 불법 주차된 차들 때문에 걷는 것도 좀 불편해졌고. 산을 넘어야 하는 20코스를 제끼고 계속 바다를 끼고 내려갔다. 하저해수욕장 근처의 카페에서 생명수와 같은 아이스아메리카노도 한 잔 하고. 주말을 맞아 한껏 꾸미고 바다 보러 나들이 나온 사람들 속에, 배낭을 메고 팔토시를 끼고 땀 흘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웃기긴 했다.
생명수!
그리고 대망의 강구항을 향해 나아갔다. 영덕에서 가장 큰 항구이자 90년대 말 60%대의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촬영지인 그곳. '영덕대게=강구항'이라는 공식이 성립된 곳. 포털을 찾아보니 이 드라마 방영 전에는 영덕에서 축산항과 강구항 두 곳이 규모 면에서 비등비등했었는데, 방영 이후 강구항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상권이며 대게잡이며 모든 게 강구항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실제로 축산항, 강구항 두 곳을 모두 가 본 입장에서 강구항이 압도적이었다. 항구 자체의 크기도 어마어마했고, 대게 식당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좌우를 구경하며 걷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좁은 2차선 도로는 자동차, 자전거, 사람, 호객꾼, 노점상으로 꽉 찼고 그 각자가 내는 소리가 거리를 빵빵하게 채우고 있었다.
강구항 대게거리의 무서웠던 간판....
정신없이 대게거리를 빠져나와 강구교를 건넜다. 여기도 대게 저기도 대게. 그까지 갔으니 대게 한 번 먹고 오라는 사람도 있었으나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 대게는 지금 제철이 아니기 때문에 패스했다. 한 끼에 몇십만 원을 쓸 순 없지. 흑흑. 이날의 점심으로 결정한 건 백반 뷔페. 단돈 8,000원! 맛나게 배를 채우고 다시 포항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헛둘 헛둘.
8,000원 백반
강구에서부턴 다시 해파랑길 19코스에 합류했다. 7번국도(지금은 '동해대로'라고 불리는 듯)를 따라가는 길. 19코스는 바닷가 마을을 계속 이어서 가는 건 아니고 국도변에 따로 설치된 데크길이 많았다. 동해안 자전거길을 위해 설치한 데크 같았는데, 자전거와 도보 여행객이 함께 나눠 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길 옆으로 차가 쌩쌩 지나다녀서 조용히,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계속 얘기하지만, 울진의 고요함이 계속 생각났다.
거의 포항에 다 와서 장사해수욕장 근처를 지나는데, 바다에 큰 군함 하나가 떠 있는 게 보였다. 해군 부대인가? 라는 생각을 하며 가까이 가 보니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몇 년 전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던 게 생각났다. 영화 '친구'를 연출했던 곽경택 감독의 작품이었다. 찾아보니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직전, 북한군을 교란하기 위해 인천과 정반대 방향에 위치한 이곳 영덕에서 전개된 또 다른 작전이었다. 당시 장사리 일대는 북한군의 점령지역이었다고 한다. 이 작전에 동원된 병사들은 모두 10대의 어린 학도병들. 많은 희생자를 냈으나 다행히 교란 작전이 먹혀 들어가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고, 이후 낙동강 동부전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고 포털 사이트 내용을 종합해 보았다. 사랑해요 네2버♡)
그런 내용들을 배 안에 전시하고 꾸며서 기념관을 만들어 놓은 듯했다. 시간이 되면 안에 들어가서 구경을 하고 싶었으나 아직도 갈 길이 구만 리. 하.... 다음에 일정을 짤 때는 반드시 하루에 20km 정도만 걷는 걸로 짜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며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오후 5시쯤 영덕의 마지막 마을인 부경리를 넘어 포항의 첫 마을인 지경리로 들어섰다. 또 한 번 걸어서 시-군 경계를 넘었다. 포항에 들어서자 해변 곳곳에 텐트가 정말 많이 쳐져 있었다. 캠핑장인 곳도 있었으나, 캠핑장이 아닌데도 그냥 빈 공간만 있으면 다들 텐트를 치는 듯했다. 숯을 피우고 이미 고기를 불판에 올린 캠핑족도 많아서 걸어가는 곳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솔솔 났다. 우리도 빨리 가서 저녁을 먹자!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 우하하하하.
지경리를 지나 드디어 화진해수욕장으로 들어섰다. 역시 포항은 군이 아니라 '시'였다. 바다 전망 좋은 곳에 예쁜 카페들이 즐비했고, 사진 찍는 연인과 가족들로 곳곳이 인산인해였다. 울진 <영덕 <포항으로 점점 도시화가 크레셴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4일 동안 온몸으로 체험하는 국토의 다양성이랄까. 확실한 건 차를 타고 지나가면 볼 수 없는 많은 것을, 그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 몸은 뻐근하고 한 번씩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나 현타가 오긴 하지만, 이것이 바로 도보여행을 끊을 수 없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흐릿했던 넷째 날 오후
숙소에 거의 다 도착하니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일기예보에 약하게 비 소식이 있긴 했는데 기상청이 이렇게 잘 들어맞다니. 급하게 해수욕장에 있는 편의점에서 라면과 햇반, 맥주 등 저녁거리를 사서 숙소로 들어갔다. 토요일 저녁의 펜션은 풀방. 펜션 곳곳에서 숯불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추적추적 비 오는 바닷가의 저녁. 술 한 잔 걸친 이들의 불콰해진 얼굴과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가는 속에서 우리도 라면을 끓였다. 그리고 다음 날엔 비가 오지 않길 기도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