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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온다 Nov 02. 2022

문득 깨달은 가족의 의미

지난 주 목요일 저녁이었다. 여느 때처럼 퇴근 후 소소한 행복인 5km 러닝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로션을 바르고 있었다. 


'쥐이이잉, 쥐이이잉'


거실 테이블에 올려 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로션이 묻은 손을 대충 몸에 닦고 후딱 뛰어가 보니 엄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엄마한테 전화를 먼저 해야지, 하면서도 잘 안 되는 못난 딸이다. 약간의 자책 아닌 자책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몇 마디 안부 인사가 오간 후 엄마의 한 마디가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나버렸다.'


아, 올 것이 온 건가. 아빠한테 무슨 일이 난 것 같았다. 나도 이제 부모님 건강을 걱정해야 하는 그런 나이가 된 건가. 찰나의, 정말 1초도 안 되는 순간 동안 수많은 상상이 머릿속을 오갔다. 억겁 같았던 순간이 지나고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이라면 더 충격이었다. 결혼한 지 2년도 채 안 된, 사촌 언니의 남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둘 사이에는 이제 8개월 정도 된 딸이 하나 있다. 나의 오촌 조카딸이다.


내가 알기론 사촌 형부의 나이가 우리 나이로 마흔셋이었고, 결혼식에서만 잠깐 얼굴을 본 게 다지만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사람이었다. 뚱뚱한 게 아니고 건강한 느낌으로. 정말 갑작스러웠다. 한 달 전쯤 테니스를 치다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다녔단다. 일이 벌어진 날에는 퇴근길에 목발을 짚고 회사 계단을 내려오다 갑자기 쓰러졌고, 근무하던 곳이 병원이라 직원들이 뛰어나와 심폐소생술을 진행하고 곧바로 병원으로 옮겼으나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다음날 오전까지 사투를 벌였으나 결국 깨어나지 못했고, 그날 오후에 사망 선고가 내려지고 말았다. 테니스를 치다 다쳤을 만큼 운동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활동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황망하게 가고 말았다. 


엄마의 전화가 온 건 그렇게 형부가 간, 그날 저녁이었다. 조문을 하려면 대구까지 가야 했으므로 엄마는 내가 힘들면 안 와도 된다고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친척들 얼굴 보는 게 정말 어려워졌기에 이런 기회로라도 가야할 것 같았다. 곧바로 회사에 연락해 하루 휴가를 쓴다고 알리고 KTX를 예매했다. 


다음날 낮에 대구에 도착해 집에 들렀다 엄마와 함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2015년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가 보는 장례식장이었다. 갈 때마다 어색하고, 유족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봐야 할지 여전히 어려운 곳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갈 일이 더 잦아지겠지. 안타깝지만. 


가니 상복을 입은 사촌 언니가 보였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어린 시절 시골 큰집에서 참 많이도 같이 뛰어 놀았다. 당시 큰집의 화장실이 집 밖에 있는 푸세식이었던 터라 냄새도 심하고 밤이면 불도 없이 정말 무서웠다. 그때마다 언니랑 같이 화장실에 가서 일을 봤던 기억이 난다. 파란 종이 줄까, 빨간 종이 줄까 장난을 치면서 말이다. 그랬던 기억 속의 언니와 현실의 언니 모습의 거리감이 너무 컸다. 내 마음도 요동쳤다. 


다른 친척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는 물론이고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도 다 퇴근하시고 부랴부랴 오셨다. 인천에 계셔서 정말 얼굴 보기가 힘든 넷째 삼촌도 대구까지 먼 길을 내려 오셨다. 언니의 외가 쪽 친척들도 다 오신 것 같았다. 다같이 조문을 하고, 유족과도 인사를 나눴다. 사촌 형부 쪽 가족 분들은 다들 울고 계셨다. 누님 분은 눈이 발갰다. 멀쩡했던, 생때같은 동생이 갑자기 사라진 아픔을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으랴. 


궂은 일 때문이었지만, 그렇게 대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다. 다들 말없이 육개장을 한 숟갈씩 뜨고 수육 조각을 입에 넣었다. 언니를 중간에 두고 삼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족이 있어 참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진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가족이 남보다 못하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요즘이기에. 하지만 축 처진 언니를 둘러싼 가족들의 모습에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그래, 형부는 그렇게 황망하게 가 버렸지만 언니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딸이 있고 항상 언니 편이 돼 줄 가족들이 남아 있지 않은가. 문득 깨달은 가족의 의미였다.



나이가 30대 중반이 되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게 들리고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밀려온다.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겠지. 형부의 명복을 빈다. 더불어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도 좋은 곳으로 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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