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말했다시피 남편과 나는 함께 해외축구 경기를 보는 사이다. 세리에A나 리그앙, 분데스리가도 조금씩 보긴 하지만 큰 관심은 없고, 주는 프리미어리그다. 남편은 프리미어리그 팀 중 아스널을 가장 좋아한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아스널을 좋아했단다. 그 당시 아스널이 가장 성적이 좋은 팀이었다고 한다. 처음 축구를 보기 시작했는데 잘하는 팀에 눈길이 가는 게 당연했겠지.
그때 아스널에서 뛰던 선수가 티에리 앙리, 데니스 베르캄프, 프레드리크 융베리 등이다. 정말 축구 역사에서 내로라 하는 선수들이다. 베르캄프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에서 우리나라에 5:0의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 네덜란드 국가대표이기도 했다. 당시 아스널의 감독은 아르센 벵거. 1996년부터 2018년까지 아스널의 사령탑이었다. 벵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끌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함께 프리미어리그에 수많은 업적을 남긴 명장 중의 명장이다. 남편은 그랬던 아스널의 황금기 때 처음 해외축구를 접했고, 그 이후로도 계속 아스널의 팬으로 살아왔다. 최근 몇 년간 아스널이 챔피언스리그에도 뛰지 못하고 부진하긴 했지만 그래도 꿋꿋했다. 이번 시즌 1위로도 올라섰을 때(지금은 4위지만)는 정말 행복해 했다.
그러다 보니 혹시라도 영국에 여행을 가게 되면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꼭 직접 보고 싶어했다. 신혼여행 때 포르투갈과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갔었는데, FC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무척이나 보고 싶어했지만 일정이 안 맞아 보지 못했다. 리오넬 메시가 그곳에 있을 때였는데 말이다. 그 이후로는 유럽에 갈 일이 없었는데, 마침내 남편이 다음주에 열흘 정도의 일정으로 파리와 런던을 가게 됐다. 회사에서 출장으로 가는 거지만 자유 시간도 있고, 같이 가는 일행들도 다들 축구에 관심이 있어서 경기 스케줄만 맞으면 축구를 보기로 했단다.
출장 일정이 잡히자마자 남편은 프리미어리그 경기 스케줄부터 검색했다. 하지만 그때는 잉글랜드 FA컵 경기가 있는 주간이라 리그 경기는 없었다. FA컵 32강이 그 주에 열린단다. 2, 3부 리그까지 포함하면 런던을 연고로 둔 팀이 꽤 많으니(첼시, 아스널, 풀럼, 크리스탈팰리스, 웨스트햄, 퀸즈파크레인저스 등등등....) 그 중에 한 팀이라도 32강에 올라와서 홈에서 경기를 한다면 직관이 가능한 상황이다. 물론 남편이 가장 보고 싶어한 팀은 당연히 아 스 널.
그리고 지난주부터 이번주, 다음주까지 FA컵 64강 경기들이 펼쳐지는 중이다. 여기서 런던을 연고로 둔 팀들이 이겨서 32강에 진출해서 남편이 축구를 볼 수가 있다. 한국 시간으로 어제 새벽, 아스널과 리버풀의 64강 경기가 아스널의 홈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펼쳐졌다. 남편은 기도하며 잠이 들었지만 결과는 리버풀의 2:0 승리였다. 아스널은 전반에 좋은 기회를 많이 얻었으나 골로 연결시키지 못했고, 후반 거의 막판에 두 골을 내리 허용하며 안타깝게 졌다. 그 중 한 골은 심지어 자살골이었다. 일부러 넣은 건 아니지만. 결국 이번 런던 여행에서 남편은 아스널의 경기를 보지 못할 운명이다.
부산 출신으로서 롯데 자이언츠를 (그래도) 응원하는 남편은 아스널이 롯데처럼 될까봐 노심초사한다. 롯데의 별명은 '봄데'다. 봄에 시작하는 프로야구 특성상 봄에만, 초반에만 잘하다가 중반 이후부터 성적이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스널도 리그 초반에 기세가 좋았는데 반환점을 돈 지금 리그에서도 순위가 떨어지고, FA컵에서도 32강 진출에 실패했다. 롯데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려는 걸까.
스포츠에서 특정 팀을 좋아한다는 건 감정의 소모가 꽤나 심한 일이다. 주식 차트처럼 종횡무진하는 경기 결과에 따라 나의 희로애락도 결정되는 게 아닐까. 축구도 야구도 오르내림이 심한 팀을 좋아하는 남편을 옆에서 보며 웃기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지만, 저렇게 온맘 다해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 꽤나 멋진 일인 것 같다. 함께 응원해 줄 예정이다. 그리고 부디 다른 런던 팀들이 32강 경기를 홈에서 치러서 남편이 뭐라도 볼 수 있게 되길 빈다. 무사히 잘 다녀와 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