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진 '검찰', '검사' 하면 '수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텐데,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지만 말이다. 여하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때를 돌이켜보면 특별히 '수사'에 뜻이 있어서 검찰 직렬을 택하진 않았다. 당시 원래 하던 일을 그만두고, 도저히 그 분야로는 돌아갈 수가 없어서 아예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여자 나이 서른에 비상경계열 전공에 3.5도 안 되는 학점으로는 갈 수 있는 사기업이 많지는 않았다. 어르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눈을 낮추면' 가능했겠지만 이미 너무 열악한 노동 조건과 급여 구조에 지쳐버린 터라 안정적인(a.k.a. 제때 월급을 주고 4대보험과 수당 등을 제공하는) 직장이 절실했다. 열흘 간 고민한 끝에 선택한 길이 공무원, 그것도 검찰직 공무원이었다.
검찰직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종각역 반디앤루니스의 공무원 수험서 코너에 있는 책들을 여러 권 둘러봤다. 그중 형법 책에 있는 판례들이 읽기에 꽤나 흥미로웠다. 판례는 실제 법원의 판결 사례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이 적혀 있다는 말이다. 수많은 수험서 중 재밌어 보이는 건 형법 하나. 그래서 형법이 시험 과목에 있는 검찰직을 골랐다. 재밌는 걸 공부해야 단기에 합격할 수 있다 믿었고 그 믿음은 맞아떨어졌다.
이 회사에서 근무하며 여러 가지 놀란 점이 많은데, 두 가지만 꼽아보자면 첫째는 검찰청에는 '수사' 외에도 정말 다종다양한 업무가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검사와 다른 공무원 간의 간격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월급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것들이. 검사는 거의 언터처블이고 다른 세상 사람이다. 그게 이 글에서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긴 하겠다만, 뭐 그렇다는 말이다.
보통 처음 입사하면 연차가 낮은 직원들은 '수사' 외의 다른 업무를 하게 된다. 보통 8, 9급들이라고 보면 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사'는 6, 7급들이 한다. 검사실에 검사와 함께 근무하며 사건 당사자들과 연락도 하고, 보고서도 쓰고, 압수수색도 나가고 그런 것 말이다. 나 같은 짬 찌끄레기들은 여느 회사에나 있는 부서(인사, 재무, 물품, 행사 업무 등을 하는)에 가기도 하고, 경찰 분들이 가지고 오는 기록을 접수하고 확인하기도 하고, 주민센터에서 일하시는 분들처럼 온갖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기도 하고(a.k.a. 민원실), 그래도 검찰청 느낌이 나는 범죄자 검거나 유치, 호송, DNA 채취 등을 하기도 한다.
이번 달에 이슈가 되고 있는(우리에게만 이슈일 수도 있지만^^) 이른바 '검수완박' 법안은 위 두 조항을 모두 삭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쉽게 말하면 검찰청 직원은 사법경찰관리로서의 권한을 완전히 잃게 된다는 말이다. 언론에 계속 보도되는 일반적인 '수사'도 당연히 못하게 되지만 그동안 해왔던 형 미집행자(단어가 어려운데, 쉽게 풀어쓰면 재판에서 실형이 선고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하는데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거나 일부러 도망 다니느라 감옥에 못 간, 안 간 이들을 말한다) 검거, 고액 벌금 미납자 검거 등이 불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검거 활동을 위해서는 대상자 및 대상자 주변 사람들의 휴대폰 사용 내역이나 은행 계좌 거래 내역 등의 조회가 필수인데 그런 것들은 모두 '강제 수사'다. 도망 다니는 사람이 자진해서 본인의 통신 이용 내역을 내놓진 않을 것 아닌가. 그래서 이 업무를 하는 검찰직 공무원들은 검사에게 영장을 신청해서 판사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아 은행이나 통신사(SKT, KT, LG U+ 등)에 보내고 회신을 받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영장을 집행한다'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사법경찰관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압수수색'도 마찬가지로 판사가 발부한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가서 집행을 하는 거라고 보면 된다. 파란색 큰 박스에 압수한 물품들을 가득 싣고 나오는 사람들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거의 경찰 분들이 많이 하시지만 어쩌다 우리도 할 때가 있다. 이 또한 우리가 '사법경찰관리'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회사 동기와 선배는 유럽 어느 나라에 가 있다.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잠적한 한 60대 아주머니를 데리고 오려고 말이다. 어떻게 발견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나라 경찰 쪽에서 우리나라 대사관으로 연락이 왔단다. 오늘 아침 비행기를 탔는데, 공항으로 가는 동기의 손에는 '구속영장'이 들려 있었다. 아주머니에게 그 영장을 보여주고 집행을 해서 인천행 비행기에 그녀를 태우고 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우리가 '사법경찰관리'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업무를 한다, 사법경찰관리로서. 그런데 이제 '검수완박' 법안이 통과가 된다면(박병석 국회의장의 중재안에도 위 두 법 조항에 대한 언급은 없었기에 중재안으로 통과가 되더라도 두 조항은 삭제가 될 터다)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이 굉장히 많아진다. 위에서 말했던 일을 거의 못하게 된다고 봐야 한다. 이를 두고 일부 내부 직원 및 언론에서는 범죄자가 판치는 세상이 될 거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경우도 있던데(검거 활동을 못하게 되니까) 뭐 그렇게까지 얘기할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묵묵하게, 주어진 일 해 오던 다수의 직원들이 갑자기 업무를 잃게 되는 게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법안이 통과되면 검찰청 인원 축소는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일이 줄어드니까. 철밥통이니(허허허허) 해고당하지는 않겠지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곳으로 보내질 수도 있다. 올해 새로 뽑힌 신규 직원들은 아직 수습 근무 중인데 검찰청이 아닌 다른 곳으로 정식 발령이 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설왕설래, 예측일 뿐이지만. 그래서 분노를 느끼고 화가 나냐고? 처음엔 좀 그랬다. 조금씩 짬이 차면 검사실에서 피의자나 고소인도 조사하고 두꺼운 기록도 읽어보고, 그러고 싶었다. 이제 그런 기회는 없겠구나 싶은 마음에 아쉽고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주말을 보내며 드는 생각은 "와, 이렇게 정치가 내 삶에 곧장 들어온다고?"였다. 스무 살 이후로 여러 번의 투표에 참여했고 공무원이 되기 전에는 한 정당의 당원으로 가입해 당비를 내기도 했다. 6년째 시사 주간지도 꾸준히 구독하고 있고 정치나 사회, 국제 등 뉴스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래도 딱히 내 삶, 내 일상생활과 정치, 정치판, 정치인, 정당이 가깝게 이어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이번 '검수완박' 논란은 인생의 새로운 경험이 되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법안을 발의하고 그들이 속한 정당이 다수의 힘으로 법안을 통과시키면 우리의 삶도 바뀌고 일부 국민들의 삶도 바뀐다. 정치가 아주 그냥 직진해서 내게 덤벼드는 느낌이다. 마치 브렉시트를 당한 영국의 젊은이들 느낌이랄까. 오바인가.
CHAOS~
아직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공노비로서 딴 데 가라면 가고 딴 일을 하라면 해야 하는 신세. 주식이나 해야겠다. 그리고 2022년은 정치가 내 삶에 쾅!하고 들어온 해로 꽤 오래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