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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온다 Jun 19. 2022

'산포'는 실재했던 것이다

해파랑길 25코스 유랑기

2022년 6월 첫 주는 아마 대한민국 모든 직장인에게 설레는 날이었을 터다. 지방선거와 현충일이 있어서 이틀만 휴가를 쓰면 6일을 쉴 수가 있는 타이밍이었다. 원래 나와 남편은 올해 초, 이 6월의 황금연휴에 해외를 갈까 고민을 했었다. 당시 코로나19가 아직 기승을 부리고 있긴 했으나 6월이면 좀 가라앉겠지, 2주 격리 의무도 해제되겠지 라는 생각을 했고, 비행기는 몇 편 없었으나 가격은 쌌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라 유류세가 오르기 전이었다. 1회 경유해서 유럽으로 가는 항공기 값이 1인당 80만 원 정도였다. 가장 싼 요금 기준으로.


하지만 추이를 지켜보던 중 전쟁이 터졌고, 입국 시 격리 의무도 해제되고 해외여행 수요가 늘어나면서 가격이 걷잡을 수 없기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비행편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니 오를 수밖에. 80만 원이었던 가격이 130만 원이 되어 있었다.... 또륵. 진작 지를 걸!!! 안타까워하면서 다시 해파랑길을 걷기로 했다. 6일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좀 더 먼 곳으로 가서 길게 걸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해파랑길을 품고 있는 도시 중 서울에서 가기 가장 어려운 곳을 꼽자면 경상북도 울진과 영덕일 터다. 기차로 접근이 불가능하고, 특히 울진까지는 고속도로가 놓여있지 않다. 서울양양고속도로나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양양이나 강릉으로 가서 동해안 국도를 타고 쭉 내려가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다. 2014년쯤 울진으로 촬영을 가며 고속버스를 탔었는데 그때도 '참 멀다'는 생각을 계속 하며 갔던 기억이 난다. 21세기의 오지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시간이 넉넉하니 멀고 먼 울진과 영덕을 지나는 해파랑길을 걷기로 했다.


지방선거날 아침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해 울진행 버스에 올랐다. 직행 버스가 아니라, 삼척을 들렀다가 울진 여러 다른 읍도 거쳐서 울진읍으로 들어가는 버스였다. 예매 사이트 상 예상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 그런데 경유지 숫자를 보니 왠지 4시간으로는 택도 없다는 쎄한 예감이 들었고, 역시는 역시였다. 양양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삼척에 접어들었을 때가 이미 출발 후 4시간이 지난 때였고, 장거리 탑승으로 인한 멀미 증세가 올 기미가 보였다. 골이 흔들린다고 표현해야 하나. 진짜 누가 머리채를 잡고 상모 돌리듯이 계속 흔드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삼척, 원덕, 죽변을 지나 서울에서 출발한 지 5시간 10분여 만에 울진종합버스터미널에 내릴 수 있었다. 밀리는 것 하나 없이 그 정도 시간이 걸리다니, 놀랍지 않은가.


흔들리는 골을 부여잡고 허기를 다스리기 위해 찾아간 곳은 터미널 바로 근처의 '청목 신신 짬뽕'. 따로 검색할 필요도 없었다. 터미널을 빠져나와 1, 2분만 걸어가다 보면 사람들이 줄 선 곳이 나온다. 지난겨울 울진 산불 사태 때 여기 사장님이 소방관 분들께 식사도 무료로 제공을 하시고 이재민들에게 기부도 많이 하셨단다. 그래서 취재를 원하는 언론이나 유튜버가 있었던 모양인지 가게 문 앞에 그런 분들의 방문을 정중히 사양한다고 되어 있었다. 사장님이 잿밥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대기 명단에 이름을 적고 20분 정도 기다려 자리 안내를 받았다. 그리 넓지 않은 실내는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다. 배달 주문도 끝없이 들어오는지 헬멧을 쓴 기사 분들이 계속 들락날락했다. 우리는 차돌짬뽕 하나 볶음밥 하나를 주문했다. 그리고 정말, 진짜 맛있었다. 5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와 배고플 때 먹으니 당연히 맛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볶음밥의 밥알은 살아 있었고 짬뽕 국물은 깔끔하고 시원했다. 물리지가 않는달까. 원래 짬뽕 한 그릇을 다 못 먹는 나인데 모든 야채와 건더기를 다 건져먹고 국물만 조금 남길 정도로 한 그릇을 다 해치웠다. 오후에 걸어갈 힘을 완전히 충전한 느낌이었다. 위치는 아래 참고.


신나게 점심을 먹고 터미널에 딸린 편의점에서 간식을 몇 개 사서 해파랑길 25코스 역주행을 시작했다. 해파랑길은 기본적으로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는 길이라, 우리의 이번 여정처럼 울진에서 영덕 방향으로 내려간다면 사실은 역주행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렇게도 저렇게도 걷는 이가 많으니 어떤 방향으로 가든 표시가 잘 되어 있어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6월 첫날의 햇살은 따사로웠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왔다.


그런데 망양정해수욕장 방향을 향해 걸어가던 내 눈에 익숙한 두 글자가 포착되었다.


'산포 1리 쉼터'.

산포... 산포.... 산포????? 그 산포?????  


그랬다. 그곳은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였다. 나의 2022년 봄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준 미정이와 구씨의 이야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배경이 된 산포시와 같은 이름의 동네가 실재했던 것이었다. 마침 그때 남편과 한창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라 둘 다 깜짝 놀랐다. 산포는 실재하는 곳이었다. 물론 드라마 속 산포시는 경기도 군포시를 가정해서 만들어낸 공간이라 여기 울진의 산포와는 당연히 다르고 작가가 이곳을 생각하고 대본을 쓰진 않았겠지만, 이렇게 여행을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사실을 알게 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러려고 여행 다니지!!!


계속 걸어서 산포2, 3, 4리를 지났다. 산포낚시도 지나고 산포슈퍼도 지났다. 산포는 꽤 큰 고장이었다. '산포'라는 글자가 들어간 간판이나 안내판을 볼 때마다 혼자 피식피식 웃었다. 해방일지 팬들을 위해 간판 등을 찍은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니 지인들의 반응도 재밌었다. 경기도 산포가 아니고 경상도 산포였냐, 그렇다면 구씨는 어디 있냐 등.(구씨는 저도 실제로 보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피식대며 산포리를 빠져나와 진복리, 오산리로 계속 내려갔다. 왼쪽엔 동해바다, 오른쪽엔 작은 바닷가 마을들. 정말 조용했다. 평일이라 더 그랬을 터.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도 없었고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식당도, 슈퍼도 없었다. 출발하기 전 네이버 지도 등을 검색해 봤을 때도 편의시설이 영 보이지 않았는데, 실제로 오니 정말 없었다. 숙소 근처에 저녁식사를 할 만한 식당도 없는 것 같아서 혹시 몰라 라면과 햇반을 챙겨 오기까지 했으니. 지도 상에 '슈퍼'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곳은 몇 군데 있었으나 실제로 가 보면 영업을 안 하는 구멍가게가 부지기수였다. 출입문은 나무 미닫이문, 지붕은 슬레이트 지붕. 영업을 한다 쳐도 왠지 진열된 새우깡의 유통기한이 2년 정도는 지나 있을 것 같은 느낌. 영화 속에서나 봄직한 가게랄까.

울진 하면 대게?


그래도 땡볕에 걷고 난 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의 호사는 누리고 싶어 서치를 해보니 오산항 근처에 카페가 하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와 같이 운영하시는 듯했는데, 최근 등록된 네이버 리뷰가 있어서 왠지 영업을 할 것 같았다. 어차피 가는 길에 있는 거라 전화는 해보지 않고 가서 열려 있으면 먹자는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먼 길을 온 터라 몸이 노곤했다. 카페인 수혈이 시급했다. 그리고 다행히!! 불이 켜진 카페가 보였다. 손님도 있었다. 븽고!!!!!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에서 용변도 해결하고 시원하게 커피도 마시고 기운을 차려서 숙소를 향해 전진 또 전진했다. 전진만이 살 길.


끝이 없는 바다를 보며 숙소에 전화를 걸었다. 근처에 저녁식사할 만한 곳이 정말로 없나요? 없단다. 오는 길에 망양휴게소가 마지막 슈퍼이니 거기서 뭐라도 사 오란다. 기성망양해수욕장 들어오기 전에 횟집이 몇 개 있긴 한데 차가 있으면 모를까, 숙소에 들어갔다 다시 거기까지 걸어서 갈 순 없었다. 배낭 속 라면과 햇반이 너무나 소중했다. 망양휴게소는 자동차 운전자는 물론 자전거족, 우리 같은 뚜벅이도 다 쉬어 가는 곳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보다 좋지는 않았지만 조그맣게 매점이 있었고 식당도 있었다. 외벽을 바다 쪽으로 통유리로 짜 놓아 식사를 하면서 동해를 맘껏 감상할 수 있는 게 포인트면 포인트랄까. 숙소에서 먹을 맥주를 두어 캔 사고 싶었는데 배낭 무게를 늘리기 싫어서 포기했다. 으하하하하. 슬픈 뚜벅이의 현실.


휴게소를 나오니 해가 서쪽으로 거의 넘어가 기운이 빠져 있었다. 바람이 부니 서늘했다. 딱 걷기 좋은 날씨. 오후 내내 쓰고 있던 선글라스도 집어넣었다. 해가 다 넘어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하는 게 목표. 동해안 자전거길을 달리는 자전거 라이더 분들도 꽤 보였다. 저분들은 오늘 어디까지 가시는 걸까. 저녁은 어디서 해결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1시간 여를 더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기성망양해수욕장 근처의 한 펜션이었다. 해수욕장 근처인데 이렇게 편의시설이 없다니 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며 노곤했던 하루를 마무리했다. 25코스를 다 걷진 못했다. 다음날 24코스와 연계해서 다 걸을 예정!


그렇다면 울진 첫날의 결론은?


울진은 시골이다. 그리고 산포가 있다. 신신짬뽕은 정말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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