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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에 경고 버튼을 누르겠습니까?

카페에 있는데 옆자리가 시끌시끌했다. “우기면 안되는 게 어디 있냐. 결국 내가 환불을 받아 냈잖아.” 한 사람이 자랑스럽게 말하자, 주변에선 “역시 목소리가 커야 돼”, “손님이 왕인데 당연히 해 줘야지” 따위의 말을 보태며 잘했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야기는 이랬다. 옷을 샀는데 한두 번 입어 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더란다. 그래서 매장에 옷을 들고 가 환불해 달라고 떼를 쓴 거다. 상표도 떼고 영수증도 없고 심지어 몇 번을 입고 외출했던 옷을 가지고. 직원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돈을 돌려줬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끼리 웃는데, 옆에서 듣는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 사람은 대체 뭘 잘했다고 저렇게 당당하지?


서비스직에서 일하는 친구들의 하소연이 떠올랐다. 손님에게 이유 없이 욕을 먹으니 자존감이 바닥을 친다고.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을 충분히 설명을 해 줬는데도 나중에 와서 그런 말 들은 적이 없다, 배 째라, 욕하며 소리를 지른다고 한다. 특정한 연령대나 성별에만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랜다. 우리 또래의 젊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본인이 지불한 돈에 서비스 비용만이 아니라 직원에게 모멸감을 줄 자격까지 포함됐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서비스 현장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짓밟는 폭언을 일상적으로 일삼는 직장 상사도 있고, 대학원생을 수년간 상습적으로 구타하고 인분까지 먹인 교수도 있다. 아파트 경비원을 하인 부리듯 대하고 폭력까지 일삼는 주민은 또 어떤가. 부끄러운 일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가까이 존재한다. 그들이 느껴야 할 수치심을, 거꾸로 그들에게 꿈, 일자리, 미래를 저당 잡혀 아무 말 못하는 ‘을’들이 감당하고 있다.



겨울철 화재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전기장판의 온도 조절기 고장이다. 특정 온도가 되면 자동 차단 장치가 작동해 전기 회로를 닫아 과열을 막아야 하는데, 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온도가 끝을 모르고 치솟아 결국 불이 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사람에게는 '감정 조절 장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감정이 적정선 이상 올라가면 폭발하지 않게 회로가 정상적으로 닫혀야 하는데, 고장이 날 경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폭언이나 폭력을 일삼게 된다.



요즘 '감정 조절기' 고장이 의심되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 건지.

충고를 가장한 폭력적인 말과 인격적 모독을 서슴지 않는 사람,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하고 고성과 욕설을 퍼붓는 사람, 특정인을 무시해 일부러 농담인 척 굴욕감을 주는 사람, 다른 곳에서 뺨 맞고 애먼 데 와서 화풀이하는 사람. 싹 다 감정 조절기 고장으로 수리를 맡기고 싶다. 그들 때문에 내가 고장 나 버리기 전에.


전기장판의 온도 조절기가 고장이 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감정 조절기도 제대로 잘 작동하는지, 고장이 나진 않았는지 자주 체크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 하는 게 가장 좋지만 대부분 스스로의 상태를 알아차리기 힘든 것 같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의 감시가 필요하다. 고장이 의심되면 주변에서 경고음을 울려 주고, 수리가 필요하다고 적극적으로 말해 줘야 한다. 알고도 쉬쉬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예전에 짧게 몸담았던 회사는 사장님의 막말과 고성이 일상적이었다. 인격을 모독하는 말들도 잦았다.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녀?” “넌 밥값도 못 하면서 밥이 목으로 넘어가니?” “네 의견이 뭐가 중요해.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나 해.” 사장님의 막말을 듣는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처럼 서 있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똥이 튀기라도 할까 숨죽이고 자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장님의 자동 감정 조절기는 틀림없이 고장 나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경고 버튼을 누르지 않고 벌벌 떨었다. 직급이 높은 분들도 그저 눈치만 보며 숨죽이는데, 아래 직원들이 뭘 할 수 있었겠는가. 모두가 방관자였고, 그 대가로 모두 피해자가 됐다.




갑질은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특정한 사람만이 겪는 일이라고 방관하다 보면 언젠가 내가 그 일을 겪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어떤 카페에는 “반말로 주문하시면 반말로 주문받습니다”라는 문구가 붙었다. 콜센터 상담원들이 폭언과 욕설을 하는 고객의 전화를 먼저 끊을 수 있도록 하는 ‘끊을 권리’도 확산되고 있다. 기업 총수 일가의 갑질 논란 이후, 수면 아래에 있던 온갖 갑질 행태에 대한 제보가 잇따랐다. 감정 조절기가 고장 난 사람들을 향해 경고음이 울리고 있는 거다. 어렵게 용기를 내 경고 버튼을 누른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어느 누구도 돈이나 지위를 내세워 개인의 인격을 모욕하거나 명예를 훼손해선 안 된다는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덕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모멸감을 줘 놓고 자기가 마치 승리자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한 사람들이 사라지길 바란다. 부끄러운 일을 했으면 수치심을 느끼고, 본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정상적으로 처리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자동 감정 조절기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까? 사회적 지위가 높고 돈 많은 사람만 점검할 게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 아니 수시로 ‘나도 혹시?’ 하고 점검해야 한다. 의외의 순간, 의외의 장소에서 고장 난 걸 알아챌지도 모른다.



[신간 에세이]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출간 기념 연재였습니다.


다음 글,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7화. 일상의 맛

11/28(수)에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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