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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박 Dec 11. 2020

소외감

후배가 상사의 생일선물을 잔뜩 사들고 왔다.


H는 세상 화려한 꽃다발과 케이크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우리 실에는 7개의 팀이 있고, 각 팀 별 10여 명의 멤버들이 둘씩 짝을 지어 앉을 정도의 폭으로 7개의 팀이 이쪽부터 저쪽까지 길게 정렬되어 있다. 13층에 들어서자마자 우측 첫 영역을 차지한 우리 팀과 옆팀 사이에는 칸막이와 책장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데, 내 자리 앞에는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정도의 “개구멍” 같은 간격이 남았다. 그래서 옆 팀 사람들은 종종 그 “개구멍”을 통해 오가기도 하는데, 옆 팀 소속인 H는 언제 외출을 했었는지, 양 손에 꽃과 케이크를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기 자리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무슨 날이야? 아 실장님...”

“네, 실장님 생일 선물이요.”

질문을 하면서도 내 일정표가 문득 떠올랐다. 다가오는 일요일에 나의 친구이자 상사인 K의 생일이 표기되어 있었고, 주말에 카카오 선물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해둔 참이었다. 실장님이 금요일인 내일 개인 휴가를 소진하는 것을 알고 H는 선물을 사 왔구나. 또 S와 함께 준비한 거겠지... 잊고 있던 소외감이 아지랑이처럼 일어 올랐다. K, S, H 그들 셋이 모일 때면 그 이외의 사람들은 이방인이나 다름없다. 처음에는 나만 그렇게 느끼는 줄 알았다. 나 또한 K와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 한 팀이었고, (물론 그때 나는 팀장이고 그들 셋은 팀원인 상황이기는 했다.) 그들의 친분만큼 나도 친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그들과 함께 할 때면 물과 기름처럼 나만 둥둥 떠있는 것 같았다. 그들 셋을 위해 늘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올해 부쩍 친해진 N이 놀라운 얘기를 했다.

“우리 실에 카르텔이 있는 거 아세요? 그 세명만의 카르텔.”

사람들이 그 세 사람의 공고한 관계에 밀려 “카르텔”이라고 험담을 시작한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란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특히 K가 실장이라는 “조직의 장”이 된 마당에 그들의 관계는 옳지 못하다며 이것이 조직윤리의 문제인 양 비난스러운 조로 N과 그 상황을 비판했다. 그들도 사람들이 자신들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정황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모임” 횟수가 잦아드는 듯했고, 그렇게 그들의 관계가 완화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전에 느낀 그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자기들끼리 친한 걸 가지고 내가 무슨 상관이냐 생각하며 그 감정을 외면하려 했다. 그러나 상관이 없진 않았다. 내 생일에는 저렇게 유난스러운 선물을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진 않았고, 그런 관계를 갖지 못한 데서 오는 일종의 외로움이나 서러움 같은 것이 생기는 것 같았다. 첫 느낌은 소외감인데, 그 기저에는 관계에 대한 소유욕이 남아서 이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꼴이었다.


사실 넓고 깊은 관계를 많이 갖고 싶었고, 그렇게 많이 가져야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미니홈피 시절에는 일촌수와 조회수에, 페이스북 시절에는 친구수와 “좋아요” 개수에 집착했다. 관계가 있는 곳엔 어디든 가야 한다는 의무감에 회식이고 모임이고 거절 않고 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레인 제임스의 “인생을 단순하게 사는 100가지 방법”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관계도 정리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불편하거나 불필요한 관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꽤 많은 관계를 정리했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관계를 소유하는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오늘 발견한 셈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매우 내성적이었다. 부모님은 아버지의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 분들과 부부 동창 모임을 자주 갖곤 하셨는데, 그 모임에 따라 나온 친구분들의 자녀들과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나는 식사를 하고 있는 엄마의 등 뒤에 얼굴을 대고 업힌 듯 기대어 가만히 쉬는 것이 더 편했다. 그러던 중에 나와는 달라서 마력으로 성격에 대한 충격을 준 사람이 있었으니, 중학교 시절 영수 과외지도를 해주었던 앞집 언니였다. 언니는 이쁘장한 얼굴과 털털한 성격에 글씨도 잘 쓰고, 농담도 잘했다. 당시 엄마라는 존재는 그저 무섭기만 했던 나에게, 엄마랑 종종 싸우기도 하는 언니는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었다. 등하교를 제외하면 친구들과의 만남도 많지 않던 내가, 친구와의 만남이나 관계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도 활달한 언니의 대학생활을 전해 들은 영향을 받아서이기도 했다. 이후로 관계는 나에게 반드시 형성하고 관리하여 부풀려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레인 제임스를 필두로 곤도 마리에와 사사키 후미오의 책을 섭렵하면서 나는 사물과 경험의 단순화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리 자체가 목적이었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구루들이 말하는 정리는 결국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나가는 중이었다. 특히 정리의 과정을 통해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면서 (코로나로 인한 집콕 생활이 거들기도 했지만) 나는 혼자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깨닫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주어진 시간에 일에 집중하는 요령을 터득하여, 일 처리 후에 집에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새로 산 소파에 앉아 책과 영화를 보는 시간이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지... 그렇게 나를 인정하고 많은 것을 내려놓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나에게는 욕심이라는 것이 남아있었는가 보다.

   

그들의 관계는 나를 불편하게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남들 시선 없는 곳에서 자신들만의 친분을 즐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꼭 그렇게 서로가 얼마나 친한지 티를 내야 하나...라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친분관계가 내 인생과 무슨 상관인가. 그들끼리 친하면 어떠하고, 나는 덜 친하면 어떠하며, 나에게 그런 관계가 없다한들 상관없지 않은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러한 관계를 가진 것이 갖지 못한 것보다 우월한 것도 아닌데...


사사키 후미오는 그의 책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에서 소중한 친구는 세 명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친구가 많으면 자랑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소중히 대할 수 없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사람이나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관계라면 한번 그 관계에서 벗어나 보는 것도 좋다. 정말로 소중한 물건은 반드시 되돌아오듯이, 정말로 서로 필요한 관계라면 반드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 사사키 후미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중, p.241


나에게도 매해 생일이나 기념일만 되면, 대단한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매해 그렇게 무언가를 준비해야 하는 노력에 지치거나 지속할 수 없는 상황들에 실망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 또한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자주 만나거나 선물을 주고받지 못한 채, 이역만리에서 무심하지만 애정 어린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언니나 다름없는 친구도 있다. 같은 집에 살며 자주 투닥거리긴 하지만,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친구처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부모님도 있다. 그리고 더 있다면 사치스러울 정도로 마음 써주는 친구들이 드문드문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뭐하러 더 끈끈하고 열정적인 그들만의 리그에 끼지 못한다고 실망하고 좌절하는가. 법륜스님의 말씀마따나 생긴 대로 살자. 그들은 그들이 끌리는 대로, 나는 내가 끌리는 대로... 지금 내가 가진 관계도 충분히 벅차고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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