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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소영 Oct 18. 2017

포장지가 없는 가게, 합리적인 나라

독일


오래전 포장지가 없는 가게, '오리지널 운페어파크트(Original Unverpackt)'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된다. 베를린이라는 먼 도시의 이야기지만 이보다 더 멋진 콘셉트를 본적이 없었다. 궁금했다. 그곳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


몇 년이 지나서야 베를린행 비행기를 탔다. 원칙과 합리성은 포장지 없는 작은 유기농 가게뿐 아니라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진작에 왔어야 했다. 독일은 로마의 콜로세움은 없을지언정 진정 시민의 기본권이 보호받고 미래로 진행되는 나라였다.



포장지 없는 가게, OU


OU가 있는 동네는 베를린 내에서도 유달리 유기농 마켓이 많았다. 달리 프로젝트가 성공한 건 아니리라. "여기서는 물건을 구입하려면 손님이 직접 담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져와야 한다. 애초에 포장지가 없으면 그만큼의 쓰레기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들었다. 하지만 막상 가게를 들어서니 제품 수만큼이나 다양한 유리병들이 진열대 하단을 차지하고 있다. 유리병을 따로 구비하는 것은 손님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일까, 타협일까.


손님은 가져온 봉지를 꺼내고 곡류 통의 오픈 버튼을 누른다. 곡류를 원하는 만큼만 담은 후 무게를 재고 가격을 지불한다. '이 멋진 판매 방식을 한국에서 할 수 있을까?'. 이후 이런 의문을 유기농 매장 한살림 관계자에게 여쭤 보았다. 유기농 사과를 예로 들자면,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이라 일정한 무게별로 맞춰 포장해야 한단다. 규격화된 공장 물건과는 다른, 소량생산 유기농 물품 판매에서 포장지는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파스타를 꺼낼 때 사용하는 위생 장갑이 준비되어 있다. 이곳은 모든 제품을 원하는 양만큼 담을 수 있다.



독일에서 중산층이란
이렇듯 독일은 환경 친화적인 나라이다. 1968년 세계혁명인 '68혁명'은 녹색당의 결과로 이어진다(독일의 녹색당은 주요 정당이다). 보다 나은 삶을 상상하는 것, 상상력의 혁명은 포장지 없는 슈퍼마켓의 비밀이다. 또한 독일 기업의 이사회는 주주이사와 노동이사가 50대 50으로 구성된다(노사공동결정제도이다). 중북부 유럽의 탄탄한 제조업은 노동자가 권리를 가질수록 경제가 발전한다는 증거이다.


중산층의 정의도 달라진다. 한국의 중산층은 '출신 대학은 어디인가' '아파트는 몇 평인가' '연봉은 얼마인가' 등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이곳은 '다를 줄 아는 악기는 무엇인가' '일주일에 문화생활은 몇 번 하는가' '어떤 책을 읽는가' 등으로 구분된다. 국가가 자본을 통제했을 때 몸은 불편하지만 스트레스가 없는 삶이 된다. 자연파괴라는 이유로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이고, 노동자 중심의 제조업이 강한 나라. 더 궁금해졌다.
 


관계를 파는 젤리 가게


하이델베르크 대학가 뒷골목에는 Heidelberger Zuckerladen라는 이름의 작은 젤리 가게가 있다. 여행자가 이 가게에서 젤리를 사려면 다음 일정을 조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먼저 할머니가 고른 젤리를 담아주신다. 계산대에 이미 열댓 명의 손님이 있다. 줄은 줄지 않는다. 이유는 이러하다. 계산대의 할아버지는 먼저 '가족 건강은 어떠한가’ 등을 물으신다. 그다음 주사위 게임을 제안한다. "이제 네가 이겼으니 보너스 사탕을 주는데 이건 어떻게 먹으면 맛있냐면 말이지...". 목소리는 따뜻하다.


아무도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다. 아, 이곳에서 30년째 할아버지가 팔고 있는 것은 관계이구나!



공원에서 서핑하다
뮌헨의 '영국 정원(Englishcher Garden)'에 가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인공파도가 시작되는 이곳은 젊은이들의 서핑 명소이다. 청계천 같은 도심 물길에서 서핑을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시내 구경보다 핫하다고 생각한건 나뿐? 목을 빼고 한참을 구경한다.
 


생태도시라 함은 그저 나무와 푸른 숲이 많은 것이라 여겼다. 이곳에서 느낀 생태도시의 정의를 이러하다. 사람이 기본 유닛이 되어 길을 만들고 건물을 짓는다. 사람-자전거-자동차 순서로 공간을 부여한다. 이러면 도시의 속도는 사람 중심으로 느리게 진행된다. 경제적, 후진적 느림이 아니고 여유로움이다. 이 정신적 빈 공간 사이에 숲이 들어선다. 즉, 숲은 덤이다.


계절마다 용도가 바뀌는 시청광장, 청계천, 광화문 광장에서 정신적 빈 공간을 느껴본 적은 없다. 사람에서 시작한 공간이 필요하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베를린에서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마르크트 할레9(Markthalle Neun)’은 천국 같은 곳이었다. 저녁에 모인 사람들은 글로벌 음식과 와인을 먹고 마시며 음악과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흥이 오른다. 퇴근 후 혼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이런 곳이 있다니. 베를리너의 목요일 밤이 부러웠다.



'마르크트 할레9'은 1891년 처음 문을 연 재래시장이다. 한때 문을 닫을 위기에 놓였던 것을 2011년 지역 주민들이 합심해 새로운 개념의 시장으로 회생시켜놓았다. 이렇게 음식과 다국적 문화가 뒤섞여 있는 힙한 곳이 100년이 넘었다니!


언젠가 서울에서 이런 마켓을 기획해보고 싶다는 바램으로 장소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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